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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평론 3) - 비호외전(飛狐外傳)

kcyland 2016.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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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도가 서로 만나니, 애닲은 정은 무상함을 한탄하다
   -<<비호외전(飛狐外傳)>>
 
   <<비호외전>>은 <<설산비호(雪山飛狐)>>의   <전편>이다. <<설산비호>>가
먼저 쓰여졌으며  <<비호외전>>이 그  후에 쓰여졌다.  <<설산비호>> 이후에
<<비호외전>>을 써야만 했던 까닭은,  <<설산비호>>에서 호비(胡斐)에게 중점
을 두어 묘사하지 않고  (그의 아버지인) 요동(遼東)의  대협 호일도(胡一刀)에
대하여 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자는 <<비호외전>> 속에서 호비의 성장 과정
및 그 성격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서술하였다.
  작가 자신의 견해에 따르면, 작가는  이 책 속에서 남의 어려움을  지체없이
해결해주고 의협심을 발휘하여 의로움을 행하는 협사에 대해 써내려고 계획하
였다고 한다. 무협 소설 가운데 진정으로 협사의 실체를 써낸 작품은 많지 않
을 뿐 아니라, 대다수  주인공들도 무술을 발휘하는 행동을  치중하지, 의협심
있는 행위에 치중하지는 않는다.  <<비호외전>>의 <후기>에서 김용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맹자는 <부귀하다고 해서 음란해서는  안되며, 가난이나 비
          천함에 구애 받지 않고, 강한 사람 앞에서 굴하지 않아야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무협의  인물은 부귀나 빈천
          을 중시하지 않고, 위압이나 힘에 굴복하지 않는 법이다. 그들
          이 사내 대장부의 이 세가지 원칙을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
          이 아니다. 이 책에서 나는 호비에게 한가지를 더  덧붙히고자
          했으니 그것은 바로  <미색 때문에  움직이지 않고, 애원이나
          간구에 빠지지 않으며, 체면에 구애 받지  않는 것>이다. 영웅
          은 미인의 유혹을 극복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호비는 원자의처
          럼 아름다운 여인에게 마음이 기울어졌었고, 그녀 역시 호비에
          대해 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가 부드러운 말로 용서해  주
          라고 부탁할 때 그 부탁을 들어 주지  않은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웅 호걸이란 항상 부드럽고 절박한 부
          탁은 잘 들어주지만, 강압적인 요구에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다. 봉천남이 금은 보화와 화려한 저택을 선물로 주었지만, 호
          비는 이것을 전혀 중시하지 않았으며, 이렇듯 성심성의껏 잘못
          을 시인하고 간곡하게 부탁했음에도 그를  용서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호에서
          는 체면과 의리를 가장 엄격하게 따지는데, 주철초 등이  호비
          의 체면을 세워  주면서 봉천남에 대한  감정을 잊어버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으나 호비는 절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상대방
          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 영웅 호걸이 가장 실
          천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호비가 이렇게 했던  것은, 단지
          종아사 집안의 네 사람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그들과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고, 조금도 교분이 없는 사이였다. 이
          러한 성격을 써내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다지 심도 있게  써
          내지는 못한 것 같다.
           
  이상은 작가의 '창작 선언'이라 말할 수 있으며, 또 작가의 <<비호외전>>에
대한 '주제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오묘한 것은 위의 문장에서 인용한 마지막 구절이다. 즉, <이러한 성격을 써
내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다지 심도 있게 써내지는 못한  것 같다.>는 말 말
이다. 왜 심도 있게 써낼 수 없었을까? 이 문제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심도 있게 써낼 수 없었던> 원인은 바로 작가가 <이런 성격을 쓰고자
했었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이 말을 언뜻 들으면 <심오>하다고 느끼게 되
지만 사실 그 이치는 매우 간단하다. <부귀해도 정도에 지나치지는 않으며 빈
천하나 뜻을 옮기지는 않으며  권세와 무력 앞에  굽힐 수는 없다>는 것이나,
<미인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으며 애원 때문에 움직이지도 않으며 체면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나, 이런 것들은 모두가 추상적인 이념일 뿐이다.
  만약 문학 창작에서 이런 추상적인 이념에  따라 연역적으로 집필을 한다면
생생한 인물 형상을 빚어내기 힘들  것이며 심도가 없을 수밖에 없다.  심도가
없을 뿐만 아니라 활기가 없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문학 작품에서 인물을 묘사하는 데에는 규율이 있으니, 모종의 관념에  따라
연역적으로 배치하지 말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소설들이 인물 묘
사에서 실패했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몇몇 무협 소설들은 '정면으로' 협
의의 형상을 묘사하려 했으나, 결과는 그저 생동감 없는 개념의 연역이 되었을
따름이다.
  대륙의 문학에서는 근래 몇십 년 동안  '영웅적인 인물'들이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생동감 없고 무겁게 개념화되고  공식화되어, 사람들이 끝까지 읽기가
힘들었었다.
  다시 한층 더  나아가보면, 협사와 영웅의  실체도 추상적인 개념이며  또한
'이상적인 인격의 유형'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 혹은 '유형'에  따라
창조해 낸 인물 형상은 반드시 '심도 있게 써낼 수'가 없었다.
  다행히 <<비호외전>> 및 그 주인공 호비는  작가가 이 책의 <후기>에서 논
했던 그런 모습만을 나타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의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총괄하는 능력이 조악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혹은 작가의 창
조적인 재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혹은 소설을 창작하
는 작가가 이상적인  개념을 연역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이
'생각처럼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혹은 소설을 창작하는 작가의 정
묘한 점은 전부 '다른 것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것'에 있기 때문일 수도 있
다. 신경쓰지 않고 창조해낸 인물과  이야기일수록 더욱 자연스럽고 순수하기
때문에 더욱 자연의 소리  같아지는 법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어떠한 원인
때문이든 <<비호외전>>은 단순하거나 개념화된 작품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 책은 계속하여 궁금하게 만들며 정채로우면서도 아주 잘 지어진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다 읽은 후에도 잊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一. 협사, 영웅 그리고 인간
  비교해보면, <<비호외전>>의 주인공  호비는 작자와 독자의  마음속에 있는
'협사'에 대한 이상적인 관념에 가장  접근한 인물일 것이다. 김용이 쓴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영웅의 기는  부족하나 남녀의 정은 많
고', 어떤 사람은 '신(神)과 마(魔)를 겸하고 있고 정(正), 사(邪) 사이에 있다.'
이들과 호비를 비교해서 말해 보면 그는 상당히 정통적인 협사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부귀하나 정도를 지나치지는 않으며
빈천하나 뜻을 옮기지 않으며  권세와 무력 앞에 굴복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또한 <미인 때문에 움직이지 않으며 애원 때문에 움직이지도  않으며 체면 때
문에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만 호비라는 인물의 성격의
한 부분이자 한 측면에 불과할 따름이다. 심지어 이러한 '의협심 있는 마음'도
호비라는 인물의 자질에 불과할 뿐이지 성격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협사와 영웅, 그리고 인간이라는 이 세가지는 자못 다른  것이다. 소설 <<비
호외전>> 속에서 호비의 형상은 이 세가지 성질을 겸비하고 있는 살아있는 집
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  협사는 '타인을 위하는' 자질을  가리킨다. '영웅'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일종의 호방하고 강개한 기질과 품격이다. '인간'은  일
상적인 생활속에서 생활하며 평범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호비라는 인물을 협사와 영웅과 인간의 살아있는  집합체라고 말하는 것은
호비 자신이 협사의 심장과 영웅의 기질과 인간의 정감을  한 몸에 모아 놓은
형상이기 때문이다. 협사, 영웅, 인간은 구체적이면서도 혼연일체가 되어  선명
하고 생동적으로 주인공을 부각시키고 있다.
  소설의 첫부분에서 호비는 상가보(商家堡)에 나타나 강호의 인물들과 우연하
게 만나게 된다. 그의 언행이 사람들로 하여금 숙연해지고 공경하도록  만들기
는 했지만 한편으론 오히려 사람들을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가 왕검걸(王劍傑), 왕검영(王劍英) 형제와 서로 싸우게 되었을 때 온갖 기
지를 발휘하고 또 유머스럽고도 교활하게 상대하는 부분에서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한 패배의 형세에 처하여 만회하기가  어렵게
되었을 때도 담담하게 <내가 도와주마.>라고 큰소리쳐서 사람들을 속인다.
  홍화회(紅花會)의 영웅 조반산(趙半山)이 오기를 기다려, <악인이  먼저 일러
바친다>는 옛말처럼 엉터리  거짓말을 지어내서 <조어르신,  이들은 밥통들과
허풍장이들 뿐입니다. 그들은 홍화회의 사람들이  모두 쓸모 없는 놈들이라고
말하였으며, 또한 자기들의 팔괘장(八卦掌)이 천하무적이라  하였고 그들 문중
의 대 영웅은 한 자루의  팔괘도(八卦刀)만 가지고도 홍화회의 모든  인물들을
무찌를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찮은 것이라도 듣고서 흘려버릴 수는  없는
지라 이렇듯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어이 굴복하지 않고서
나와 겨루려고 합니다. 조 어르신, 그러니 내가 화가 안 나겠는지 말씀좀 해보
십시오. 이런 까닭에 당신한테 평을 내려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라고 운운하
였던 것이다. 이 말은 터무니 없이 날조된 것이다. 이간질하는 이런 말은 아마
도 '협사'가 할 도리가 아닐 것이며 '영웅'으로서도 할 수 없고 또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호비는 아주 생기 발랄하게 총명과 기지를 발
휘하는 장난기 있고 유머 있는 어린애였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다.
  이처럼 호비의 형상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오줌을 싸서 태극권의  고수인
진우(陳禹)를 막아내고 또 진우의 수중에 있던 인질들을 구출해내는 장면은 다
른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해낼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호비는 오
줌을 한번 싼 일로 책 속에서 더욱 선명하고  활동적인 사람으로 생생하게 묘
사되었다.
  호비는 소년 시절에는 유머와 기지가  있으면서도 의협심을 잃지 않았었고,
장성한 후에도 비록 협사와 영웅의 본색을 갖추긴 했지만 기지가 넘치고 장난
이 지나치며 무례한 그의 기질을 고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그가 장성하여
강호를 방랑하다가 광동  지방의 불산진(佛山鎭)에  있는 영웅루(英雄樓) 앞에
이르렀을 때 수중에는 백여 문의  동전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수만 먹을
수 있고 술은 먹을 수 없었는데도 기어코 영웅루에 들어가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주루의 사환은 그의 행색이 남루한 것을  보고는 얼굴 가득
          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팔을 벌려 그의 앞을 막고서 말했다.
            "손님, 누상에는 귀빈석만 있는데, 손님께는 너무 비싸지 않
          겠습니까?"
            호비는 이 말을 듣자 울화가 치밀어 올라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들은 영웅루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도  가난한 친구를
          이토록 무시하다니. 내가 너희들의  주루를 발칵 뒤집어  놓지
          않는다면 이 호비는  절대로 영웅 호걸이라고  자처하지 않겠
          다.'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술과 음식이 깨끗하고 맛이  좋다면 가격이 좀 비
          싼 들 무슨 상관이겠나."
            사환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곁눈질로 그가  누상에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호비가 그의 '의협심에  따라 행동하는' 영웅적인  생애를 살아가기
직전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는 '그의 영웅적인 기개'를 '먹는 데에'  사용하였
으며, 분명히 돈이 없으면서도 오히려 <술과 안주는 좋고 맛난 것으로 가져오
되, 가격이 얼마인지는 따지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가격이 얼마인지는 따지지 마시오>라고 할 수 있으며 또 어떻
게 <호비가 헛되이 영웅이라 불렸겠오?>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이같
은 행위는 아마도 '협의'의 본색이 아니며 또한 '영웅'의 할짓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호비가 돈이 없으면서도 먹으려 할 때는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사
정이 있을 것이다.
  호비가 사소한 일(돈도 없으면서 먹고 마시는 따위)에 있어서는 <사소한  일
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큰 일에 있어서는 선악이 분명
하여 중심을 잃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원자의(袁紫衣)가 몇몇 문파의 장문인 지위를 빼앗고  사람들과 싸울 때, 그
는 생각도 해보지 않고 원자의를 도왔다. 주의할 것은, 그는 원자의가 몰래 봉
천남(鳳天南)을 돕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으나 원자의가 장문인  지위를 빼
앗는 의도가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하였다. 장문인의 지위를 빼앗는 목적은 반
드시 알아내야 했었다. 재능이 뛰어나고 담대한데다 나이 어려 제멋대로  행동
하는 호비와 원자의 두 사람에게는 굉장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는지 몰라도
구체적인 한 문파로 말하자면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크나큰 사건인 것었이다!
더욱 위험한 것은 호비가 이런 몇몇 장문인을 알지  못하여 그들이 선한지 아
니면 악한지 판단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원자의를 도와주기로 작정한 후 그녀를 도와  구룡파(九龍派)의 장문인
을 이기게 해주었으며, 다행히 위험에서 벗어난 후에 그는 다만 몇 마디 말만
을 했을 뿐이다.
 
   "원낭자, 천하에는 모두 몇 문파나 있소?"
            원자의가 말했다.
            "호 오라버니, 그대의 무예도 매우 고강한데 몇 문파의 장문
          인을 차지하는 게 어떨까요? 우리가 같이 길을 가면서 당신이
          한번, 나 한번 이렇게 번갈아 장문직을 거둬들이는 거에요, 그
          런 식으로 북경에 도달하면, 내가 열 세 문파의 총장문인이 될
          테고, 당신도 역시 열 세 문파의 총 장문인이 되지  않겠어요?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복대수의 천하장문인대회인지 뭔지 하는
          곳에 참석한다면 정말 재미있을 거에요."
            호비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난 그럴 용기가 없다오. 더군다나 소저처럼 훌륭한  무예도
          닦지 못했고. 십중 팔구, 반 쪽의  장문인도 빼앗기 전에 상대
          방의 발길질에 걷어차여  냇가로 떨어져 진흙탕에  범벅이 된
          강아지 꼴을 면치 못할 게요. 진흙파의 장문인만 된다는  것은
          별로 영광스럽지 못할 것 같소."
            원자의가 깔깔거리며 웃더니 예를 갖춰 포권을 취하고 말했
          다.
            "호호호! 호 오라버니, 제가 사과를 드릴께요."
            호비도 포권으로 반례를 하며 점잖게 말했다.
            "삼대 장문인 나으리, 감당하기 어렵소이다."
            원자의는 그가 얌전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말하는 것이 재미
          있어 마음 속으로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
          다.
            "조반산이라는 늙은 녀석이 그대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것
          도 과연 무리는 아니었네요."
            호비는 조반산을 잊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물어
          보았다.
            "조 셋째 형님께선 어찌 되셨소? 그 분이 그대에게 무슨 말
          씀을 하셨습니까?"
 
  이와 같이 '협사'와 '영웅'의 '형상'이 비록  '크게 더럽히는 데'까지 이르
지는 못하였으나 적어도 '약간의 손색'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호비
에게 자연스런 본색이다. 그는 본래  이런 사람이며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그를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그를  좋아할
것인데 이는 그가 사람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협사'와 '영
웅'의 개념으로 생기발랄한 호비를 '지나치게 구속'한다면  그 또한 바람직하
지 못한 일일 것이다.
  협사와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비호외전>>은 조반산,  묘
인봉(苗人鳳)과 같은 인물들이 지닌 영웅적인 기개와 의협심도  선명하게 써내
었으며 따라서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킨다.
  묘인봉은 꺾이거나 해치울 수 없는 대 영웅이다. 그러나 조반산은  지나치게
인자하고 후덕한 대 협사인 것이다.
  다시 호비의 마음속에 있는 묘인봉을 살펴 보자.
 
            호비는 '금면불(金面佛) 묘  대협'이라는 여섯 마디를  듣자
          두려워져서 아, 하고 외마디 놀란 소리를 질렀다. 그는 묘인봉
          과 자신의 부친이 생전에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강호에 전해지는 말로는 자신의 부친이 그에게 죽임을 당하고,
          호비의 평사숙(平四叔)이 호비를 부양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호비가 상가보에 있을 당시 묘인봉을 한번 만나 볼 인연이 있
          었으나 그가 위풍당당하게 느껴져 당시 어린  마음에 그를 깊
          이 흠모하게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살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
          데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조반산
          과 묘인봉 두 사람 뿐이었다. 조반산과 그가 의형제를 맺자 묘
          인봉은 그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한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매번 이 사람을 생각할  적마
          다 영웅호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후에 호비가 묘인봉을 보았을 때  본의 아니게 묘인봉을 해쳤으며  또 온갖
어려움 끝에 그를 구해내었다.  묘인봉은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호비를
실망시키지는 않았다. 묘인봉은 호비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대로 진정한 대
영웅이요 대 호걸로서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 사람을 진심으로 경탄케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여기서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다.
  조반산은 책의 서두와 결미에서 한번 등장하는데, 마치 신령스런 용이  머리
만 보이고 꼬리는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인자하고 후덕하며  관대하여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였으며 약한 자를 도와주고  가난한 자를 구제한다는 협
사의 형상을 우리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겨주었다. 책에서 쓰여진 바는  다음
과 같다.
 
            조반산은 성품이 인자하여 설사 극악무도한 자를 만난다 해
          도 그가 못된 짓을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지 않는 이상, 종
          종 연민의 정을 느껴 그저 톡톡히 혼내  주고 설득을 해서 그
          가 개과천선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곤 했다. 진우의 무공은 이미
          상실되어 폐인과 다를 바 없었을 뿐 아니라,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 이상 못된 짓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더
          구나 그의 표정이 하도 가련한지라 손을 허공에 쳐든 채, 고개
          를 돌리고는 손강봉에게 물었다.
            "손형, 이 자의 무공이 이미 제거되었으니, 손형이 처리하도
          록 하시오. 다만, 전 손형께서 이  자의 목숨만은 살려 주시기
          를 간청드리고 싶소."
 
  조반산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원수를 갚느라고  천리길도 멀다고 여기지 않
고 바쁘게 뛰어다녀 마침내 원흉을  잡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워낙  악랄하고
흉악하여 몇번이나 조반산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조반산은 끝까지 그를  죽
이지 않고, 그를 위하여 사정을 하였으니  <천개의 팔을 지닌 여래>라는 명성
이 헛되지 않다. <천개의 팔>은 그의 암기(暗器)에 대한 공부가 세상을 뒤덮을
만하여 그것이 마치 천개의 팔이 있는  것과 같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래>
는 그의 자비로운 마음과 온화한 얼굴이 마치 여래불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위에서 서술한 인용문에서 이 협사의 인자하고  후덕한 크나큰 마음과 도량
을 볼 수 있다.
  <<비호외전>>에는 강호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유명하면서도 간담을  서늘하
게 하는 '독수약왕(毒手葯王)'의  몇몇 사도들은, 진실로  품행이 나빠서 항상
강호를 나쁘게 만들지만 오히려 자기자신은 대  호걸이요 대 영웅이라 여기는
것이다. 독수약왕은 먼저 대진(大嗔)이라 불리웠으니  패기가 사납고도 조급하
였다. 후에 수양을 쌓아서 자못 진보가 있게 되자 이름을 일진(一嗔)이라 고쳤
고, 다시 그 후에 미진(微嗔)이라 고쳤으며, 마지막으로 무진(無嗔)이라고 고쳤
다. 독수약왕의 세상을 뒤덮을 만한 기술은 오히려 대진으로부터 무진까지  변
화하였으니 그 호걸다운 마음, 영웅의 본색, 뛰어나서  평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대 영웅 묘인봉, 대 협사 조반산, 대 호걸 독수약왕, 이 세 사람을 제시하여
야 했던 까닭은 이 사람들의 성격과 도량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호비와 비
교해 보면, 호비는 나이 어리나 기지 있고 유머 있으며 원만하고 재미있고 활
발하여 천성이 순진한 본색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성격과 형상은 절대
로 '협(俠)'이라는 한 글자로 개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협사요, 영웅이요,
게다가 생기발랄한 젊은이인 것이다.
 
   二. 의협, 복수, 인생
  <<비호외전>>에서 서술한 것은 단지 호비의 의협적인  일만은 아니며, 종아
사(鍾阿四)의 네 식구들의 생명을 위하여  봉천남(鳳天南)을 쫒아가 죽이는 이
야기도 있다. 소설 속에서 호비는 의협심 때문에 봉천남을 쫒아가서 죽이게 되
는데 그것은 많은 소설 줄거리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주요 줄거리'라고도 말
하지 않았으며 '유일한 줄거리'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호비가 종아사를 위하여 봉천남을 쫓아가 죽여  복수를 한다는 이런 줄거리
이외에도 <<비호외전>>에는 적어도 아래의 몇몇 줄거리가 또 있다.
  첫째는 '젊은 영웅'이다. 호비가 상가촌에서 보낸 소년 시절은 사람들이  잊
기 어려운 경력이다. 소년 호비의 형상도 깊이 있게 사람들의 마음에 남게 되
었으며 또한 책 뒷편에서 나오는 고사도 여기에서 그 복선을 깔고 있다. 그 예
로 묘인봉과 전귀농(田歸農)의 사랑 이야기도 있다.  마춘화(馬春花)의 애정 비
극 및 호비에 대한 <말 한마디로 서로 구해주게 되는 은혜>, 조반산과 의형제
를 맺고 난 이후 계속해서 원자의와 호비가 해후하여  그 관계를 벗어나지 못
한다는 비극 등등...
  둘째는 호비가 원수를 찾는다는 것이다.  호비가 봉천남을 쫓아가서 죽이게
되는 과정에서 <천하무적의 고수>  금면불 묘인봉과 연관된 일에  맞부닥치게
된다. 손을 잘못 찔러 묘인봉의 눈을 다치게 한 일인데, 대장부는 은원을 분명
히 가려야 하므로 오히려 묘인봉을 위하여 독수약왕에게 가서, 치료법과  약을
구하여 마침내 묘인봉의 눈을 잘 치료하였고 또한 그를 도와 전귀농을 물리쳤
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아버지를 죽인 원수>임을 알게  되자 <은인과 원수
사이에서> 고통받는 그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끝내 묘인봉을
죽이지 못하였으며, 묘인봉의 눈을 치료해준  점에 대하여서도 후회하지 않았
다.
  셋째는 은혜를 갚는 일이다. 당시  마춘화는 상가촌에서 어린 호비에게 <말
한마디의 은혜>를 입혔다. 그녀의 은혜와  덕행은 영원토록 그의 마음에 남겨
져 있었다. 또 <쏟아지는 폭포수같은  은혜를 용솟음치는 샘물로 갚아준다>는
말대로 마춘화를 구출하기 위하여 호비가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
다. 그러나 사건마다 뜻하지 않게 발생하였음을 누가 알겠는가. 마지막에 가서
마춘화의 중독이 이미 심해져서 임종하게 될 즈음 호비는 그녀의 희망대로 홍
화회에 요청하여 진가락(陳家洛)을 복강안(福康安)으로  변장시켜 마춘화를 안
정시켜주었으니 그녀의 마지막  소망을 달성시켜준 것이다.  호비의 <은혜 갚
음>은 정성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떨어지는 폭포수같은 은혜를 어찌 다만
용솟음치는 샘물로 갚아줄 따름이겠는가? 강물을  가르고 바다를 뒤엎는 식으
로 갚아준 것이다.
  넷째는 정과 재앙에 얽혀드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특수한 줄거리로서  줄
거리 속의 줄거리이다. 호비가 강호에서 의협심을 발휘하고 원수를 찾아  헤매
고 은혜를 갚는 것, 가는 도중에 원자의, 정영소라는 두 소녀와의 정의 뒤엉킴
을 서술하였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정영소는 사랑 때
문에 죽었고 원자의는 병들고 한을 품은 채 떠나가니 호비는 홀홀단신이 되었
다.
  다섯째로 천하 장문인 대회이다. 이것 역시 책 속에서는 아주 중요한 복선이
된다. 원자의가 툭하면 다른 사람들의 장문의 지위를 빼앗으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그럼으로써 소란을 피워 만청 왕조를 불안하게 만들어 결국 그들로 하여
금 '천하장문인대회'을 열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호비도 처음에는
그 까닭도 잘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는 결국 화권문(華拳門) 장문인의  지위를
빼앗아 그 '천하장문인대회'에 잠입하여 의매(義妹)인 정영소와 함께 대회에서
커다란 난동을 부리게 된다. 홍화회의 영웅들이 오고, 원자의가 위군자(僞君子)
인 감림혜칠성(甘霖惠七省)의 진면모를 폭로하자 결국  이 '천하장문인대회'의
음모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또한 호비가 종아사를 위해 봉천남을 쫓아가서 죽이는 복선도 깔려 있다. 원
자의가 세번이나 그 봉천남의 목숨을 구한 것은 봉천남이 바로 그녀의 친아버
지이자, 그녀 어머니의 철천지 원수였기 때문이었다.  봉천남은 원자의의 어머
니인 은고(銀姑)를 강간하고 그 연인을 죽였으며,  또 집에서 쫓아내어 원자의
의 어머니로 하여금 강호를 떠돌다가 결국 좋은 종말을 맞지 못하고 비참함만
겪다가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렇게 <<비호외전>>이라는 이 소설 줄거리의  복선은 최소한 여섯 가지가
넘는다.
  주의할 것은, 위의 여섯 가지의 단서  중에서 어떤 단서가 이 소설의  '주된
단서'인지를 말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또한 이것은 바로 이 소설의 오묘한 부
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섯 가지의 단서는 비록 독립적이긴 하지만 서로 복
잡하게 얽히고, 서로 관련되고 연결되어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유기적인 총체
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비호외전>>의 구조상의 정묘함을 볼 수 있다. 이
여섯 가지 단서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또 서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곡절과
변화와 긴장이 가득 차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될 이 여섯
가지 단서가 호비의 일생의 비참함과 또 변화다단한 인생 역정을 이루고 있다
는 점이다. 여섯 가지의 단서는 호비라는 이 인물의 형상과 성격의 서로 다른
시기와 서로 다른 측면의 형상과 서로 다른 성격의 층차와 서로 다른 인생 경
험 및 깨달음을 구성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호비가 종아사를 위해 봉천남을 쫓아가 죽이는  이
단서만을 가지고도 호비의  <미색에 동요되지 않고,  애절한 간구에 동요되지
않으며 체면에 동요되지 않는> '성격'을 설명할 수 있으며, 작품의 줄거리 구
조 방면에서 말하든, 아니면 호비라는  이 인물의 성격과 형상 방면에서  말하
든, 어떤 한 측면을 가지고 전체를 개괄해도 타당성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서로 다른 단서 중에서, 서로 다른 시기와 서로 다른 측면과 서로 다른 이야
기와 서로 다른 성격의 층차  속에서, 우리들은 비로소 하나의 완정한  호비를
볼 수 있으며, 하나의 완정한 작품인 <<비호외전>>을 볼 수 있게 된다.
  소설의 앞 4장에서는  대체적으로 호비의  소년 시절의  경험을 서술하면서
'소년 영웅'의 형상과 그 활발하면서도 교활하고  지혜가 넘치는 성격을 돌출
시켜 묘사하는 동시에 또한 아주 간략하면서도 다채롭고 심도 있게 강호 사람
들의 험악함과 인성의 예측 불가능함,  또 애정과 원한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보도와 유정(柔情)>이라는 이  두가지는 결국 함
께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비바람 몰아치는  상가보(商家堡)>에서는 상노태
(商老太)의 복수가 눈물겹도록 감동적이면서도 모골이  송연하게 묘사된다. 그
녀는 반쯤은 미친 상태로 자기의  고집만 부려서 거의 이성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녀의 충성스럽고 성실하다 못해 어느 정도는 우매하고  완고하며
고집스러운 성격은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하며, 침묵한 채 정신을 빼게 만
들고, '용광로 속에서 불에 달구어  진' 인생백태와 그 속에서  나온 대 영웅,
대 협사의 호방한 기질과 넓은 포부를 느끼게 한다.
  마춘화(馬春花)와 서쟁(徐錚), 상보진(商寶震), 복강안(福康安) 세 사람 사이의
얽히고 섥힌 애정은 마치 귀신이 곡할 정도였다. 이것들은 서로 전혀 상관 없
는 '무슨 뜻을 두지 않은 서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인공 호비와 대단히
큰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을 통해 호비라는 소년 영웅의 성격이 표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호비의 '인생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천수여래 조반산은 호비의 스승이며  그에게 무공의 정수와  사람의 덕행과
품행을 가르쳐 준 사람이다. 묘인봉, 전귀농, 남란, 염기, 왕검영, 왕검걸,  상노
태, 진우 등등은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모두 그의 스승이었으며 직접적으로 혹
은 간접적으로 교훈을 남겨 주었다. 그리고 상가보에서의 그 모든 사건들과 장
면들 역시 전부 이 소년 호비에게 심각하고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깊은 인상
과 교훈을 남겨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 몇 장은 이후 줄거리의 여러
복선을 깔고 있다.
  호비가 의리 때문에 봉천남을 쫒아가  죽이고, 은혜를 갚으려고 몇번씩이나
마춘화를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이  줄거리는 호비라는 주인공의 성
격과 형상의 '전부'를 선명하게 서술해내고 있다. 그리고 천하 장문인  대회라
는 이 줄거리와 호비가 진가락을 복강안으로 변장시킨다는 놀랍고도 정채로운
광경은 호비라는 인물이 해학적이고 활달하며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대의
를 품은 사람임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줄거리는  구성상
의 '주제'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전체의 '클라이막스'라고도 말할 수 있다. 동시
에 호비의 또 다른 '학습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호비가 원수를 찾는 이 줄거리는 중요하고 특출한 것 같지는 않으나 호비와
묘인봉이 교분을 맺고 왕래하여, 이로 인해 독수약왕을 찾아가고 정영소를  사
귀게 되는 이 몇몇 장은 소설 가운데 가장 정채롭게 쓰여졌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강호풍파악(江湖風波惡)>에서 <독수약왕>, <은구지제(恩仇之際)>에 이르는
4장은 비록 편폭이 길진 않으나 문학 작품 중 그  주제와 상관없는 듯한 문장
도 보이며 묘인봉과 호비라는 한명은 늙고 한명은 젊은 두 영웅, 대 호걸의 성
격 형상 및 서로간의 극히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를 매우 정채롭고도 심각하게
서술하였다.
  예를 들어, 호비와 묘인봉이 만나게 되는 순간을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
다.
 
            호비는 고개를 돌리자 묘인봉이 두 손으로  눈을 누르며 매
          우 고통스러운 듯이 얼굴을 일그러 뜨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서서 도와줄 생각도 했으나 그가 갑자기 장력을  내
          쏟을까봐 걱정이 되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묘 대협, 내가 비록 당신의 친구는  아니지만, 결코 당신에
          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이 몇마디의 말은 아주  지극히 간곡한 것이었다.  묘인봉은
          비록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고, 또 간악한 사람의  암습에
          당해서 두 눈이 찌르는 듯이 아파오고 있었지만, 이 말을 듣자
          자연히 이 젊은이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는 말이 있듯이 이  순
          간의 몇 마디 말에 서로 의기투합하게 되어 말했다.
            "자네가 내 대신 저 문 밖의 간악한 놈을 막아주게나!"
            그는 호비의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대답
          하지 않았지만 그에게 간적을 막아 달라고  부탁한 것이 바로
          그를 절친한 친구처럼 여기는 그의 뜻을 드러낸 것이었다.
            호비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한마디는 아주 호기로운  말
          로, 포부가 넓은 대 영웅, 대 호걸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백발이 성성하도록 오랫동안 사귄 친구라도 새
          로 사귄 사람같을 수가 잇고, 잠시 인사를 나눈 사이라도 오래
          된 친구같을 수가 있다는 말처럼, 호비는 그 한마디에  기꺼이
          그를 위해 끓는 물속이나 세차게 타오르는 불길속으로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씨 삼형제가 집과 아직 이십여 장쯤 떨
          어져 있는 것을 보고 즉시 촛대를 들고 부엌으로 달려가 항아
          리에 있는 물을 한 바가지 퍼서 묘인봉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빨리 눈을 씻으십시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하지 않던가? 이것이 이른바 사귄지 얼마 안되었
으나 옛 친구같다는 것이다. 이런 문장을 읽어 보면 사람들은 뜨거운 피가 솟
구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욱 정채로운 것은, 호비가 묘인봉이  <아버지를 죽인 원수>임을 알았다는
점이다. (비록 사건의 진상은  이처럼 단순하지는 않으나 이렇게  말하는 것도
불가하지는 않다) 묘인봉도 호비와  호일도의 관계를 알게 되었으니,  비록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영웅들끼리 서로 아낀다 하나  <아버지를 죽인 원수인데
원수를 갚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묘인봉은 몸을 돌리며 뒷짐을 진 채 입을 열었다.
            "자네가 호일도 대협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말하려고 하지
          않으니, 나도 묻지 않겠네. 소형제, 자네가 내 딸을 돌봐  주겠
          다고 승낙했으니, 그 말을 명심해 주기를 바라네. 좋아, 자네가
          호 대협의 원한을 갚겠다면 손을 쓰도록 하게나."
            호비는 단도를 쳐들었으나 공중에서 내려치지  못하고는 속
          으로 생각했다.
            '조금전에 묘 대협이 가르쳐준 '이객범주(以客犯主)'의 요결
          을 이용해서 칼을 내리친다면 그는 절대로 피할 수가 없을 것
          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부모님을 죽인 원수를 갚게 되는 것이
          다!'
            그러나 묘인봉의 낯빛은 아주 평화롭고  상심하거나 두려워
          하는 모습이 전혀 없으니 그가 이 칼을  어찌 내리칠 수 있었
          겠는가. 그는 별안간 울부짖으며, 몸을 돌려 달려나갔다.
 
  이 단락의 정채함은 호비와 묘인봉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탁월하다. 묘
인봉은 호일도에게 상처를 입혔던 일을 반평생 동안 후회했었다. 그는  호비에
게 오해를 분명하게 해명하고 싶었으나 혐의를 피할 수  없게 되자 슬프고 괴
로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예 오해를 살만한 일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단지 <내가 죽였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
하게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사람을 대하고서도 오히려 <너는  내 딸을 돌봐주
겠다고 했으니 이 말을 명심하거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호에서는 원수를 갚는데 있어 <풀을 베고 뿌리를 뽑아 후환을 없애는> 것
이 보통이나 여기서는 매우 다르다. <<설산비호(雪山飛孤)>>에서  호일도가 단
칼에 베어질 때 묘인봉에게 자기  아들을 돌보아줄 것을 청하고  묘인봉 또한
승낙했던 일이 생각난다. 이것은 실로 영웅의 세계에서나 자유로운 일이지  보
통 사람은 하기 어려운 바이다.
  호비도 마찬가지로 영웅의 본색을 잊지  않았으므로,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잊은 건 아니지만 눈먼 사람에게 해를 더 입히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
  죽음에 임하여도 묘인봉의 얼굴 기색이 평화로왔던  것은 죽음을 전혀 두려
워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예전에 호일도를 단칼에 죽였던 응분의 대가
로 여기고 진실로 달갑게  받아들인 것인가? 아니면  호비의 공격이나 방어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기에 그런 것인가? 혹은 세가지 모두를 다 가지고 있었
기 때문인가?
  호비는 끝내 <소리만 한번 크게 지르고 몸을 돌려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
지 않았다면 호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三. 애모, 연애, 원한
 
  만약 굳이 <<비호외전>>의 '주제'를 말해야 한다면,  이 소설의 주제는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보도(寶刀)>로서, 영웅 협객들이 의롭고  의협심 있는 일을 행하며
강호를 떠돌면서 마음대로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정(柔情)>으로서,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즐거워하면
서도 세상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여 가슴 가득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비호외전>>에서 '보도(寶刀)'라는 주제가 '정극(正劇)'의  한 형식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보도가 서로 만나 즐거워한다(寶刀相見歡)>는 것이 된다. 소
설의 또 다른 주제는 바로 <부드러운 정과 한(柔情恨無常)>이니, 이것은 비극
적 주제이다.
  <<비호외전>>에서 서술하고 있는 '애정 비극'은 주인공 호비와 원자의, 정
영소 간의 슬프고도 애절한 사랑 이야기  및 비극적인 결말로 서술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인물들의 애정 비극도(공통점은 어떤 것도 비극적인 결
말로 끝난다는 것) 묘사해내고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비극은 각각 다른 표현
형식을 지니고 있다.
  첫째, 협객 묘인봉의 애정 비극이다. 묘인봉은 관리 집안의 딸인 남란(南蘭)
의 생명을 구해주고 남란은 이에 감격하여  묘인봉의 다리에 난 상처를 치료
해 주면서 육체 관계를 갖고 난 후 부부로 맺어졌다. 그러나 묘인봉은 출신이
비천한 강호협객에 불과하였고 아내는 관리 집안의 금지옥엽이었다. 묘인봉은
원래 천성이 과묵한데다 온종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가 부드럽고 자상하게 대해주며 소리를 낮춰 부드럽게 위로해 주길 원하였
다.
  그녀는 풍채가 우아하고 여자를 다독거려주는 남자를 원했으며,  농담도 잘
하고 시시덕거릴 줄도 아는 남자를 원하였다. 묘인봉은 온 천하와  겨루어 적
수가 없을 정도의 무공을 갖추었을  뿐, 아내가 바라는 것은 전혀  갖고 있지
못하였다. 만약 남란이 무술을 할 줄 알았다면 아마 남편의  수완에 감복하여
그가 어째서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걸출한 남자가 되었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근본적으로 무술을 경시하였고 심지어  내심으로는 무
술을 싫어하고 증오하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부친이 무인에 의하여 죽임을 당
했기 때문인데, 그 원인은 바로 그  한 자루의 칼에 있었다. 또한  그 때문에,
자기 마음도 몰라주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으니 그 원인 또한 이 남자가 무
술을 사용하여 자기를 구한 데에 있었다.
  이처럼 비극의 서막은 이미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상가촌에서 보았던 남
란이 남편과 딸을 버리고  전귀농을 따라 무정하게  떠나버리는 장면은 단지
이 애정 비극의 전반부에 불과하다. 묘인봉은 진실로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였
으나 그는 남란을 지극히 사랑하였기 때문에  전귀농에게 해조차 입힐 수 없
어서 마음속으로 용서를 하는데, 여기서 대장부의 호방함과 깊은 비애가 동시
에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전귀농도 여기서부터 무서운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묘인봉의 아내
남란과 몰래 도망친 후 그는 그녀가  당대 제일의 협객의 아내임을 상기하고
는 먹어도 맛을 모르고 잠자리에 들어도  편안하게 잠들지 못하고 바람이 불
어 풀만 스쳐도 묘인봉이 원수를 갚으러 왔나 의심하였다. 또한  남란은 처음
에는 전귀농에 대해 목숨까지 내걸  정도로 열렬히 빠져들었으나, 그가  매일
안절부절못하며, 밤낮으로 옛남편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는 경멸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묘인봉을 두려운 인물이라고 여기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진실로 서로 사랑하기만 한다면 묘인봉에게 단칼에 죽임
을 당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귀농이 전전긍긍하자, 그의 생
명에 대한 애착이 그녀에 대한 애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딸을 버렸고 자신을 따라다니던 명예와 절개마저 버렸다. 그
러나 전귀농은 애정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두려움
때문에 전귀농의 풍류와 시원스러운  면은 퇴색하였다. 그래서 거문고,  바둑,
책과 그림에 대해 별로 흥미가 일지 않았다. 매우 드물게 그녀를 데리고 화장
대 앞에서 향수를 뿌려주고 화장을 해주면서 농담과 사랑을 주고받았을 뿐이
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몰래 도망쳤던 그런 열정은 이미 식어버렸으며 사랑하
고 기뻐하던 격동도 이미 변질되었고 애정의  비극도 줄곧 그것의 종말을 향
해 달리고 있다.
  둘째, 마춘화의 애정 비극이다. 이 아름답고 건강하며 소박하고 천진난만하
며 표사의 딸이기도 한  여인은 상가촌에서, 아버지에 의해  그 도제 서쟁(徐
錚)의 처가 되었고, 상가촌의 어린 주인  상보진(商寶震)의 구애를 받았다. 그
러나 그녀는 심심풀이로 한번 놀아보고자  하는 복강안의 정부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물론 복강안의 치밀하고 계획적인 유혹이었지만, 그 소녀의 환상과
무지는, 봄날 황혼녘에 자신조차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격정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단지 복강안의 표정에 부드러운 연모의 기색이 나타나고, 그의 눈빛에
서 열정적인 애모의 뜻이 뿜어나오는 것을 보기만 하였을 뿐이엇다.  그는 비
록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이런 모습은 수천만 마디의 사랑의 고백
이나 태산같은 맹세보다 효과적이었다. 약혼자 서쟁의 우악스러움과 질투심에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느껴졌다.  마춘화는 복강안의 정부가 되
어, 심지어 그 부친이 원수에게 무참히 죽음을  당할 때에도, 그것도 모른 채
애인과 운우의 쾌락을 나누었던 것이다. 후에 복강안이 가버렸으나 그녀 자신
은 그의 아이를 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서쟁과 혼인하여
그 부친의 유지를 받들었다. 또 후에 복강안이 우연히 이 정부가 생각나 사람
을 보내 대대적으로 찾게  되자, 마침내 사랑하지 않던  남편 서쟁을 죽이고,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던 상보진마저 죽이고,  두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한번
복강 안의 품안에 뛰어들었다. 그녀가 이처럼 분별없이 사랑에 빠져들고 사랑
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어 그 자신도 헤어날  수 없게 된 것을 단순히 권
세 있는 자에게 아첨하여 들러붙은 것이라고 책망할 수는 없다.  그녀 자신도
복강안에 의해 살해될 때까지  여전히 이런 맹목적인  마음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으며, 마침내 참사를 당하면서도 여전히 다시 한번 쳐다보았으니 이는 영
원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셋째, 독수약왕 문하의 세 제자간의 사랑으로  인한 재난과 다툼이다. 셋째
사매는 대사형을 사랑했으나, 대사형 모용경악(慕容景岳)은 그다지 셋째 사매
설작(薛鵲)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모용경악은 이미  결혼하였다. 또 둘
째 사형 강철산(姜鐵山)은 특별히 셋째 사매를 사랑하였지만  셋째 사매는 그
를 사랑하지 않았다. 끝내 설작은 모용경악의  부인을 독살하게 되었다. 모용
경악은 크게 노해서 독을 써서 설작을 곱사등으로 만들고, 다리병신으로 만들
었다. 그러나 강철산은 여전히 싫어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설작과 부부가 되
었다. 이 다툼은 원래 여기에서 끝나야 했으나 누가 알았겠는가?
  모용경악은 강철산과 설작이 결혼하자  갑자기 설작의 그  모든 좋은 점이
떠올라 이 때문에 설작에 대해 치근덕거리기를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애증은 십 년이나 엎치락뒤치락하였다.  그러나 최후에는 모용경악과  설작이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로 돌아가 설작의 남편인 강철산을 살해하였다.  이 한
쌍의 악독한 연인은 정영소의 손에  모두 죽임을 당한다. 그들의  연애사건은
삼류로 떨어졌으나 그 애증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기에 오히려 슬프며
한탄스럽게 여겨지는 것이다.
  네번째는 원자의의 모친 원은고(袁銀姑)와의  만남이다. 원은고는 생선가게
의 소녀였는데, 아름다웠으므로  사람들이 '흑모란'이라  불렀다. 아름다움은
그녀의 운명을 고난의 심연으로 떨어지게 했다. 우선 남패천 봉천남에게 강간
을 당하자, 그것을 아버지에게 알려 아버지의 생명을 잃게 만들었다. 그 후로
는 돌아갈 집이 없어 떠돌아다니던 중에 봉천남의 사생아를 낳을 수 밖에 없
게 되었다. 겨우 한 생선 도매상의 점원과 원은고는 결혼하기로 하였으나, 결
혼식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봉천남이  보낸 십여 명의 부하들에 의하여
막 축하주를 마시려던 사람들은 모조리  내쫒겼으며 은고와 결혼하려던 생선
도매상의 점원은 죽임을 당한다. 은고는 갓 태어난 어린 딸을 돌보기 위해 치
욕을 무릅쓰고 삶을 연명하여, 강서  남창부(江西 南昌府)에서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협객 감림혜칠성(甘霖惠七省)인 탕패(湯沛)의 집으로 도망가 하녀가 된
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협객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과 같은 자로, 은고를 욕
보인다. 은고는 더 이상은 살아갈 수 없어, 다만 자살함으로써 영원히 호소할
수 없는 치욕과 비애를 씻을 수 밖에 없다.
  이 이야기는 애정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단지 한 여성의
비참하기 짝이 없는 고통의 역사이다. 봉천남은 털끝만큼의 양심도 없는 악한
이며, 도덕 군자로 행세하는 탕패도 마찬가지로 뱃속이 시커먼 자이다.
  이상은 모두 비극이다.
  또 작품의 '주제', 즉 호비와 원자의 및 정영소 사이의 애정과 갈등도 마찬
가지로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정영소는 호비에게 첫눈에 반하여 생사를  함께 하게 되나, 공교롭게도  그
전에 호비와 원자의는 이미 서로 알게 되어  사랑의 감정을 가눌 수 없게 되
었다. 정영소는 호비를 극히 사랑하여 희망이 없음을 명백히 알면서도 처음의
감정을 고치지 않고 끝내 호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호비의 몸속의 독을 빨
아내고 자신은 생명을 잃는다.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밑도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그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많은 일들을 회상했다. 호비는  정영소의 말 한마디,  한 번의
          미소를 그 당시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  생각
          해 보니 그 가운데 담긴 부드러운 정과 애틋한 마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 님을 그리는 그녀의 깊은 은정,
             그녀의 정을 저버리지 말아라.
             그녀를 만나면 애정으로 대하라.
             그녀를 만나지 못하면 하루에도 수십번
             마음속으로 생각해야 하나니."
            왕씨가 부르던 그 사랑의 노래가 그의  귓전에 맴도는 듯했
          다.
            "난 그녀에게 잘 대해 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죽어버리
          고 말았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난 그녀에게 잘해 주기는 커
          녕 도리어 매일같이 다른 여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중략)
            하지만 어쩌면 이것 역시 그녀는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
          다. 그녀는 호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고, 또 자신이 호비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렇게 깊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
          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
          을 구하고 그 독으로 자신의 목숨을 앗아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는 분명히 읽는이로 하여금 감동의 눈물을 머금게 하는 이야기이며, 사람
으로 하여금 비통케하고, 만회할 길 없고 선택의 여지 또한 없는 비극적인 결
말이다. 호비는 결코 정영소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단지
남매간의 사랑일 뿐이었다. 호비는 무엇이든 그녀에게  줄 수 있었고, 무엇이
든 그녀를 위해 할 수 있었으나, 그녀를 애인으로 사랑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갈망한 것은 호비의 애정이었다. 만약 그의 사랑이 없다면, 그
녀는 살아갈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정영소는 죽었다. 호비와 원자의 사이의 감정은 원만한 발전과 결과를 얻지
못했다. 비록 그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 싹텄으나 원자의는  원래 '원자의'가
아니었다. 그 '원'은 그녀의 어머니의 성이었고,  또 비구니의 '圓性'과 같은
발음이었다. 마찬가지로 '자의(紫衣)'는 원래 '승복'과 같은 발음이었다. 원자
의는 원래 비구니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굳은  맹세를 강요당하였으나
가슴속 깊이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질 것을 결심하고 정을 끊어버린다.
  아아! 이러한 애정 비극은 과연 얼마만큼이 운명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  얼
마만큼이 인간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인가? 얼마만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
는 운명의 장난>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 얼마만큼이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선
택>에서 나온 것인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비구니(원자의)가 <두 손을 합장하고 불경을 외는>
광경이 나온다.
 
            모든 사랑은 열매를 맺지만 무상하여 오래 가지 못한다.
            세상에 태어나면 고민이 끊이지 않고,
            이 세상의 인연은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버린다.
            사랑 때문에 근심이 생기고 사랑 때문에 번뇌가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근심도 번뇌도 사라지리라.
 
  비구니는 그 말을 마치자, 곧  <조용히 말에 올라 유유히  서쪽으로 갔다.>
과연 그녀의 행동은 옳은가, 그른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누가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슬프고 슬프도다!
  보도는 서로 만나 기뻐하지만
  애닯은 정은 무상함을 슬퍼하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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