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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평론 5) -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kcyland 2016.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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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도 잘못 되고 끝도 잘못되다.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서검은구록>>은 일명 <<서검강산(書劒江山)>>이라고도 한다. 1955년에 김
용이 최초로 지은 무협 소설이다. 이 작품을 쓰기 전에 김용은 어떠한 형식의
소설도 써본 적이 없었으나, <<서검은구록>>이 발표되자 그 평범하지 않은 수
법이 온 세상을 놀라게 하여, 무협  소설계의 '천자(天子)'가 세상에 나타났다
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김용의 무협 소설 중에서 <<서검은구록>>은 물론 최고로 잘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의 '무림지존(武林至尊)'의 지위를 견고하게 굳혀 준 역작(力作)
인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등보다 부족한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온 힘을 기울여 정성들여 써낸 <<협객행(俠客行)>>, <<천룡
팔부(天龍八部)>>, <<녹정기(鹿鼎記)>> 등과 비교해 보면 훨씬 더  뒤떨어진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최초로 공(功)을 세운 업적은 없앨 수 없는' 법이다.
  이 김용 최초의 작품이 독자들의 놀람과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절대로
요행이 아니다. 책 속에 담긴 '예술적 업적'에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부분
이 꽤 있어서, 김용 소설 가운데의, '김파 무공(金派武功)'의  '내공'과 '초식'
의 기본적인 틀이 굳혀졌다고 할 수 있다.
 
    一. 강호(江湖)와 강산(江山)
  무협 소설은 당연히 무공이나 협의와 관계가 있고, 강호와 녹림의 기인 협사
들 사이의 은혜와 원수에 얽힌 사건들을 많이 언급한다. 그러나 김용의 소설은
많은 부분에서 이와는 다르다. 강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역사(江山)
을 많이 언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검은구록>>은 일명 <<서검강산(書劒江山)>>이라고도 한다. 이 책에서는
비단 검(劒)의 은구(恩仇:강호 인물들의 은혜와 원한)을 다룰 뿐 아니라  서(書:
조정과 역사를, 국가의 한과 집안의 원한, 민족의 은혜와 원한)에 대해서도 다
루고 있다.
  김용의 처녀작인 이 작품에서 이미 <강호>와 <강산>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
으며 무협소설의 범주를 넘어서 역사소설의 경지를 열어 놓았던 것이다.
  <<서검은구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중요한 역사적 인물은 청나라 초기 전성
기 때의 유명한 황제인 건륭제이다. 이  작품은 또한 강남세가(江南世家)의 자
제인 진가락을 수령으로 하는  홍화회(紅花會)의 군웅들이 반청복명(反淸復明)
을 위하여 투쟁하던 경과를 다루면서 진가락과 건륭 황제 사이의 사적인 은원
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청나라 건륭 18년 6월, 섬서의 총병 아문 내원에서 벌어진 사건에
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처음부터 역사소설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고 할  것이
다.
  김용은 이 소설의 <후기>에서, 김용 자신이 절강성 해령 출생으로, 어려서부
터 건륭 황제가 축조한 석당(石塘)에서 건륭제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았고, 향
비(香妃)에 관한 전설을 생각해 보았다고 쓰고 있다.  그런 연유로 <<서검은구
록>>같은 역사 무협 소설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용은 그의 소설에서 자주 역사배경을 설명한다. 이는 그의 무협소설에 신
빙성을 부여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사실, '건륭  18년 봄' 운운하며 시작하
므로 <<서검은구록>>은 역사 소설이면서 무협 소설이 될  수 있었다. 어떤 부
분이 꾸며낸 것이고 어떤 부분이 사실인지 구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
다.
  이리하여 역사적 사실과 전기(傳奇)적 이야기가 잘 융합하여  독특한 풍격을
이룰 수 있었고, 역사 인물과 허구 인물이 예술적으로 통일될 수 있었다. 그리
하여 역사 인물에게 영원한 인성(人性)을 부여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건륭제는 역사 인물이고 진가락은 허구의 전기적 인물이다. 건륭 황제가  한
족의 후예도 아니고 진가락의 친형도 아니지만,  이 사실이 <<서검은구록>>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 인물에게 영원한 인성을  부여함
으로써 김용의 재능이 탁월함을 증명되었다고 할 것이다.
  건륭 황제가 만약 정말로 진가락의 형이었으면서도, 인연의 기이함으로 인해
만청(滿淸)의 황제가 된 것이었다면, 그는 진실을 알게 된 후에 무엇을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필연적으로 <<서검은구록>>에서 했던 것처럼 할 수밖에  없었
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인성이 그렇게 하도록 시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김용의 무협 소설이 강호의 일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강산의 일
까지 쓰는 것에 대해 '지리적인' 관점에서 말해 보자.
  <<서검강산>> 혹은 <<서검은구록>>에서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적인 장면
이 물론 많이 있거니와, 그 중에서도 절대로 대충  지나갈 수 없는 장면은, 모
래 바람이 온통 날리는 회강(回疆)의 사막에서 봄바람에 버드나무 가지가 흩날
리는 아름다운 강남(江南) 지방에 이르기까지, 만리에  걸친 조국 강산을 이처
럼 광활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이리하여 외국의 독자나 작가들에게 절대적인
흡인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의 독자들 역시 이러한  '강남서검정
(江南書劒情)'과 '사막은구록(戈壁恩仇錄)'의 강함과  부드러움이 서로 조화되
고, 굴하지 않는 의협심과 부드럽고 어진 마음이 잘 어우러져 있는 문장을 읽
으면서 이 책에 빠져들고 매혹되어, 무수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만리에 걸친 드넓은 강산을 자유롭게  누비는' 광활한 무대가 있어
야만이 비로소 진정한 '영웅의 본색'을  드러낼 수 있는 법이다. 만약  김용이
묘사해 내는 인물과 그 배경이, 다른 소설들처럼 일개 개인의 사사로운 복수에
한정되어 편벽한 산촌이나 한 도시에 제한되었다면, 그 인물이나 작품은  수준
이 떨어져, 열이면 열 모두 "소도(小道)"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넓은 무대와 거대한 기세만이 김용의 넓은  포부와 뛰어난 수법을 드러내고
펼쳐 보일 수 있다. 역사와 지리는 무협 소설에서는 그저 하나의 배경, 하나의
예술, 그리고 예술가의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김용이 쓰는 소설에서는,
마치 한신(韓信)이 병사를 뽑는  것처럼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크면 클 수록
좋은 것이다.
  이 말은, 역사적 이야기를 무협 소설에 인용하고 산천의 풍경과 강남의 아름
다움을 무협 소설에서 묘사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도 모두  할 수 있는 일
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것들은  김용의 소설 <<서검은구록>>에서처
럼 역사시(歷史詩)같은 드높은 기세로 써 내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어떤 의미로는 <<서검은구록>>과 김용의 다른  여러 작품들은 바로 독특한
하나의 풍격을 이룬, 일종의 영웅들의 역사시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이
작품과 김용 소설의 비범한 점이요, 다른 사람들은 배워도 흉내낼 수 없는 점
이다.
 
    二. 무술과 예술
   무협 소설은 당연히 무예(武)와 떨어질 수 없고, 무공의 초식이나 싸움과도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바로 이 점이 무협 소설의  오락적이고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점은 김용의 소설도 다른 무협 소설과 마찬가지
이다. 하지만 <<서검은구록>>에서 김용이 말하는 '무예'에는 오락적인 볼거리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도리(秘訣)' 역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용이 묘사하는 무공은 재미있을 뿐 아니라 배울 점도 많다.
  김용 소설의 무공의 명칭과 싸움 동작들은 하나의 격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의 다른 소설의 예술적 정체(整體)의 유기적인 일부분이 되고 있어서 개별적
으로 나눌 수 없다.
  김용이 묘사하는 무공은 실제적인 초식이나, 혹은 실제적인 어떤 파의  무술
도보(圖譜)와 그 유파(類派)간의 계승이 아니며, 또  무슨 금나수(擒拿手)니, 응
조공(鷹爪功)이니, 사권(査拳)이니, 담퇴(潭腿)니, 팔괘장(八卦掌)이니, 태극권(太
極拳)같은 진짜 무공이 아니다. 만약  그것들이 진짜 무공이라면, 아마 지나치
게 경직되고 생동감이 없게 되어 싸움 장면 묘사에  있어서의 재미가 없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환주루주 이수민 류의 다른
무협 소설가들처럼 두서가 없거나 황당무계한 검선(劒仙)의 무술과도  많은 점
에서 차이가 있다.
  김용 소설의 무공은 실제와 가짜의 중간 쯤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
론 그 무공들을 권경(拳經)이나 검보(劒譜)로 삼아 연습할 수는  없지만, 책 속
에서 감상하고 느끼고 맛볼 수는 있는 것이다.
  김용이 묘사해내는 무공은 그의 소설 예술의 유기적인 일부분이 될 뿐만 아
니라, 심미적 예술 그 자체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다음을 보자.
 
            3초가 끝났다. 곁에서 바라보던 사람들은 진가락이 금나수에
          응조공을 섞어 쓰고,  왼손으로는 사권(査拳)을,  오른손으로는
          면장(緬掌)을 썼으며,  공격해 들어갈  때는 팔괘장(八卦掌)을,
          거둬들일 때는 태극권(太極拳)으로 바꾸는 등, 여러 종류의 초
          식을 마구 뒤섞어 쓰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어서 옆에서 지켜 보던 사람들은  눈이 어지러울 지
          경이었다. 이 때 그의 권법은 이미 어느 문파의 어떤 초식인지
          가려내기가 힘든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원래 이것은 천지괴협(天地怪俠)  원사소(袁士宵)가 만든 독
          자적인 권술인 백화착권(白花錯拳)이었다. 원사소는 어렸을 때
          무학을 깊이 연구하여 어느 정도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으
          나, 후에 크게 실망하게 되는 사건을 만나 성정이 바뀌게 되었
          다. 그리하여 전인(前人)들이 하지 않았던 일을 하고 전인들이
          연마하지 않은 권법을 연마하려고 하여, 국내의 유명한 고수들
          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거나, 훔쳐 배우거나, 혹은 싸움을 걸
          어 그 초식을 살펴 보거나,  남몰래 그 비급을 훔치기도  하면
          서, 유명한 고수들의 권술을 거의 대부분 완전하게 연마했다.
            중년 이후에는 천지(天地)에 은거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권술
          을 하나로 융합하는데 열중하여 드디어  백화착권을 만들어내
          게 되었다. 따라서 이 권법은 포함하지 않는 권술이 없었다.
            그 오묘함은 바로 이 착(錯)이라는  한 글자에 있었다. 모든
          초식이 각 문파의 정통 수법과 같은 것지만 달라서,  출수했을
          때 상대방은 그것이 어떠한 초식이라고 단정을 내렸다가 주먹
          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공격해 들어오는
          위치와 수법이 자신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정묘한 요결은 바로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달라서,
          상대방의 의표를 찌름(似是而非, 出其不意)'에 있었다.  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방향이 어긋나게 잘못 친다고만 느꼈을 뿐
          이었지만, 바로 이렇게 잘못  치기 때문에 상대방은  막을래야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백화(百花:여러 종류의  초식)는 쉽
          게 막아낼 수 있지만, 이 착(錯:잘못) 만큼은  당해내기 힘들다
          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장면에서, 진가락이 백화착권을 펼치는 모습을 아주 재미있고 오락적
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사실 더욱 귀중한 것은 재미나 오락보다도 그 '도리'에
있다 하겠다.
  이 장면에서 권법은 정말 가히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 이 권
법은 아름답다. 이 권법의 이름은 뜻밖에도 <백화착권>이라 하니, 권법의 이름
에 <백화(百花)>라는 말을 넣은 것으로 보아, 그 강맹함  외에 또 일종의 향기
로움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김용이 창조해 낸 기적이다. 김용 소설에서는 무공이 이처럼  아름다
운 연상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권법과 검법이 많은데, 그것은 바로 이 백화착
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다음으로 이 권법은 완전히 신기하면서도 독창적이다. 만약 모든 무협  소설
의 싸움에서 서로 주고 받는 초식이 그저 태극권이라든가 팔괘장만을 계속 반
복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무미건조할  것인지 생각해 보라. 그렇기  때문에 이
백화착권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모두 신선함을 느끼게 되었다.
  소설 속의 협사, 영웅들이 끝없는 신기함을 보여 줄 때, 독자들도 아마 마찬
가지로 통쾌함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용이 만들어 낸 새
로운 초식은 끝없는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가장 중시해야 할 것은, 그 안에 '도리가 있다'는 점이다. 그 안에는 아름다
움과 신기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느끼고 감상하고 사색할 만한 것들
이 있다. 총명한 사람이라면 이 '백화'는 쉽게  막아낼 수 있어도 '착(錯)' 만
큼은 당해내기 어렵다는 사실과,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달라서 사람들의 의표
를 찌른다>는 이 말에 얼마나 높고  깊은 학문적, 철학적 이치가 담겨져 있는
지를 자연히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무학의 고수들은 견문이  넓고 학문이
깊어서, 여러 문파의 무예에 대해 일찍부터 제각기의 편견을 갖게 된다>는 말
을 운운함에 있어, 바로 이 '편견'이 '실패의 요인'이 됨을 말하고 있어서, 우
리들에게 더욱 더 큰 깨달음을 가져다 준다.
  사실 가장 중요한 점은 어쩌면 이  백화착권이 원사소와 진가락이라는 사부
와 제자 간의 인생 역정과, 인물 성격 및 그 운명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는 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백화는 쉽게 막아 낼  수 있어도 착(錯) 만큼은 당
해내기 어렵다>는 말은 바로 이 사부와 제자의 불행한  운명과 성격의 내력을
깊고 세밀하게 묘사한 것이다.
  원사소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권술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며, 진가락이 아
니었다면 그 권술을  익히지 못했을  것이니, 그  안에 담긴  이치는 바로  이
<<서검은구록>> 중에서 원사소와 진가락의 인생 역정 및 그 성격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김용 소설에서 보이는 무술의 초식과  그 명칭은 대부분 그  인물의 성격과
운명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의 면리침(綿里針) 육비청(陸菲
靑)이 잘하는 무공은  '부용금침(芙蓉金針)'과 '유운검술(柔雲劍術)'이다. 이것
은 홍화회(紅花會)의 분뢰수(奔雷手) 문태래(文泰來)의 강인한  힘과 굳고 곧은
의기와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책속의 아범제(阿凡提)는 성격이 유머스럽고 재치가 많기 때문에 그의 무술,
병기 역시 사람들에게 기괴하고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
도 없다.
  이처럼 각 사람의 무술과 병기는 모두 그 사람의  성격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김용이 무술을 예술로 승화시킨 오묘함이 깃들어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다시 제 17회의 결미 부분을 보자.
 
            곽청동(藿靑桐)이 불쑥 물었다.
            "장자(莊子)에 뭐라고 쓰여 있는데요?"
            진가락이 대답했다.
            "한 백정이 있었는데, 소를 잡은 솜씨가  아주 뛰어나, 손과
          팔을 뻗었다가 움츠리고,  다리와 무릎을  내밀었다가 거두고,
          칼을 내리치고 하는 것이 어느 하나 음악의 박자와 조화를 이
          루지 않는 것이 없고, 그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기
          좋았다는 이야기지요."
            향향공주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건 정말 재미있겠는데요."
            곽청동이 말했다.
            "적과 싸울 때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군요."
            진가락은 이 말을 듣자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무엇이 있
          었다. <<장자>>라는 책은 그가 줄줄 외고 있었고 조금도 신선
          하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었는데, 그 책을 지금까지 한번도  읽
          어 보지 않은 사람이 이에 대해 언급하자, 새로운 이치를 깨닫
          게 된 것이었다. '포정해우(疱丁解牛)'라는  이 단락의 문장이
          한 글자, 한 글자씩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 소신은 정신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감각이 아닌 영감만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천리(天理)에 따라
          서 뼈와 살을 가르고, 뼈마디 사이사이에 있는 큰 구멍에 칼을
          집어 넣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생각이 이어졌다.
            "행동은 천천히, 칼을 놀리는 동작은 더욱 세심히 하다 보면
          마치 흙덩이가 땅에 우수수 떨어지듯이 고기가 갈라집니다. 그
          제서야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  보며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진가락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눈으로  보지 않고도
          칼을 조금만 움직여 간적 장소중(張召重)이란 놈을 죽일 수 있
          을 텐데..."
            곽청동 자매는 그가 돌연 넋이 빠진 것을 보고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으나,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홀연 진가락이 말했다.
            "당신들은 잠깐만 기다리시오!"
            날듯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걱정이 되어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희색이 만면하여  대
          전의 해골 옆에서 손발을 휘둘러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것은 진가락이 무공 하나를 깨닫는 장면이다. 이 무공은 과연 곽청동이 희
망한 것처럼 <적을 맞아 싸울 때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것이었
고, 또 향향 공주가 기대한 것처럼 <정말로 재미있는> 것이기도 했으니,(이 두
자매중 하나는 무예를 할 줄 알았고, 다른 하나는 춤만을  할 줄 알았으니) 즉
무술이면서 예술이기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철학적인 이치를
꽤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이 <<장자>> 속의 철학적인 이치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많이 얘기할  필요가
없다. 얘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한가지는 바로 <포정해우장(疱丁解牛掌)>을 연
마할 때의 진가락과 <백화착권>을 연마할 때의 진가락이 비록  동일한 인물이
기는 하지만, 경험과 경력이 늘어남에 따라, 그의  성격과 기질에 커다란 변화
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백화착권>에 대해  쓴 단락과 <포정해우장>에 대해
쓴 단락의 내용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안에 담겨진 오묘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三. 기이한 사람(奇人)과 기이한 정(奇情)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서검은구록>> 및 김용의 무협 소설이 지니고 있
는 가장 독특하고 신기한 점은 아닐 수도 있다. 김용 소설의 진정한 매력과 문
학적 위치와 예술적 가치는, 그가 인물 묘사를 중요시하며 그 인물을 성공적으
로 창조해냈다는 데 있다. 김용 소설의 <묘수>는 <기이한 사람(奇人)>과 <기이
한 정(奇情)>의 창조에 있다.
   김용 선생은 <당신은 이상적인 무협 소설이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
까?>라는 독자의 질문에 대답한 적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
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소설가들이 중시하는 점은  대개 다음과
          같습니다. 1)배경 묘사를 중시한다. 2)줄거리를 중시한다.  3)인
          물을 위주로 한다.
            중국 고전 전통 소설은  대체적으로 인물을 위주로  합니다.
          예를 들어 <<수호전>>,  <<홍루몽>>, <<서유기>>가  그러합니
          다. 우리들은 이러한 소설을 읽고  난 뒤 시간이 많이  지나게
          되면 아마도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많게  될 테지만 노지심이
          나 임대옥, 손오공같은 책 속의 인물들은 머리 속에 뚜렷이 아
          로새겨져 계속 기억될 것입니다.
            제가 무협 소설을 쓰는 데 있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이상
          은 인물 창조에 있습니다. 무협 소설의 줄거리들은 모두  아주
          신기하고도 아주 길어서, 독자들이 이 줄거리를 분명히 기억하
          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 됩니다. 저는 묘사해 내는 인물들이 생
          동적이고, 제각기 자기만의 개성을 지녀서 독자들에게 깊은 인
          상을 남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저는 구상할 때도 주인
          공을 중심으로, 먼저 몇 명의 주요 인물들의 개성을 어떻게 살
          릴 것인지, 줄거리를 주인공의 개성에 어떻게 합치 시킬  것인
          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개인이 가진 성격에 따라  다
          양한 사건들이 발생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협 소설 자체가 오락성을 지닌 것이기는
          하지만, 저는 그 안에 인생의 철학적 이치나 개인의 사상이 어
          느 정도 담겨 있어서,  소설을 통해 개인적인,  혹은 사회적인
          시각을 표현해 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기에서 김대협(金大俠)은 그의  '무학 비결(秘訣)'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생동적이고 활발하면서도 또 개성을 갖추고  있는 인물 형상을 빚어내는
것이다.
  이 말은 말하거나 듣기는 쉬운 것처럼 생각되며, 심지어는 약간  진부하면서
도 고루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진정코 이런 시각을 갖고 직접 만들어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무협 소설 속에서 그런 시각을 가지
고 써내는 것은 더더욱 참신한 일이 된다. 그런데 김용 소설 속에서는 작자가
확실히 그런 시각으로 써 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서검은구록>>의 진정한 성취는, 건륭황제, 곽청동, 객사려(喀紗麗, 원사소,
천산쌍응(天山雙鷹)을 포함하여 홍화회의 수령들과 그 관련 인물들의 생동적인
형상을 빚어낸 데에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진가락은 말할 필요도 없고(이 인물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보다 전문적으로 논함) 다른 인물들 역시  아주 생동감있고 활발하여 각자 나
름대로의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운 깊은
인상을 남겨 준다. 그 원인을  따져 본다면, 전부 <기이하면서도  아주 진실하
기> 때문일 것이다.
  홍화회의 수뇌급 영웅들로  말하자면, 다른 것은  제외하고, 외형상으로만도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그 외팔에다가 수염이 긴 도사는 무진도장(無塵道長)이고, 중년에다 약간 뚱
뚱하면서 얼굴에는 온화한 빛이 가득한  자는 조반산(趙半山)이고, 위풍당당한
풍채에 사내답고 건장한 자는 분뢰수 문태래이고, 그 옆의 교태롭고 연약해 보
이면서 아름다운 여성은 그의 부인인 낙빙(駱氷)이고, 귀신같은 얼굴에 피부색
이 검은 자는 당연히 흑무상(黑無常) 상혁지(尙赫志)이고, 피부가 흰 자는 당연
히 백무상(白無常) 상백지(尙伯志)이고,  키가 작으면서 약간  거무스름한 자는
무제갈(武諸葛) 서천굉(徐天宏)이요, 사람도 크고  그 말도 큰 자는  철탑(鐵塔)
양성협(楊成協)이며, 곱사등이는 장진(章進)이고,  손에 금피리를  든 준수하고
소탈한 자는 여어동(余魚同)이다.  당연히 인물의 형상과  성격은 절대로 그저
'외형상'으로만 구별할 수 없는 법이다.
  우리들이 이렇게 분류해 본 의의는,  한편으로는 김용이 인물의 '서로  다른
형상'에 대해 고심하며 연구한 흔적을 살펴 보는 데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설사 외형상으로라도 홍화회의 여러 수령들이 소수의 몇 명을 제외하고는,  거
의 모두가 '기형적인 이상한 모습'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점을 살펴 보려는 데
있다.
  외팔이도 있고, 곱사등이도 있으며, 심지어는  검은 사람도 있고, 흰  사람도
있다. 큰 사람, 작은 사람, 뚱뚱한  사람, 마른 사람 등, 모든 형태의  사람들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그 안에 담긴 의의는 '외형
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인물들의 성격 역시 그들의 서로  다른
외형과 마찬가지로 아주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무진 도장은 용감하고 호방하면서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고,  조
반산은 누구와도 좋게 지내고, 태도가  온화하며, 행동거지가 우아한 반면,  온
몸에 암기를 잔뜩 지니고 있어서  사람들이 '천비여래(千臂如來)'라고 부른다.
문태래는 폭발적인 성격과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세를 풍기며, 그로  인해
약간은 비뚤어진 면이 있기까지 하다.
  흑무상과 백무상은 침울한 낯빛을 하고 있으며,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
만 가슴 속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기(義氣)가 가득하며, 여어동은
준수하고 소탈하여 강남의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도  마찬가지이다. 낙빙은 제멋대로이면서도  온화하
고, 주기(周綺)는 아리따우면서도  성질이 사나우며, 곽청동은  아름다우면서도
시원스럽고 씩씩하며 지혜가 많고 총명하고, 객사려는 천진난만하여  신선같은
등등, 모든 사람들이 읽고 나면 잘못 기억할 리가 없을 정도로 선명히 부각되
어 있다.
  <<서검은구록>>에서 묘사된 사람들은  분명 기인들이다. 심지어  별로 많이
등장하지 않는 원사소, 진정덕(陣正德), 관명매(關明梅), 아범제  등등의 인물들
도 어느 하나 기이하고 독특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 한번 보면 잊혀질 수가 없
을 정도이다.
  <기인>이 있으면 <기정(奇情)>이 있기 마련이다. 사실 <<서검은구록>>은 완
전히 <<서검정구록(書劒情仇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책  속에서
<정>이라는 이 한 글자에 대한 묘사와 서술이 아주 기이하면서도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이미 결혼한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면서 그 둘의  애정이
진실하여 가히 정격(正格)이라고 부를 수 있는 화목하고 아름다운 문태래와 낙
빙 부부 외에는, 정과 관련된  다른 사건들은 전부 '원한과 업보'에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기이한 곡절과 안타까운 부분들이 더욱 더 완곡하게 변
화되어 사람들의 감동과 슬픔을 자아냐고 있다.
  책에서는 진가락, 서천굉, 여어동과 곽청동, 객사려, 주기, 낙빙, 이완지(李浣
芷) 사이의 정에 얽힌  사연들을 정면으로 부각시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진가락과 곽청동 자매의 정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무제갈 서천굉과 주기, 그리고 여어동과 낙빙, 이완지  간의 정에 얽힌 사건
은 은근하면서도 변화와 곡절이  많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감탄과 슬픔을 자아낸다.
  무제갈 서천굉은 키도 작고 눈도 작지만 지모가 아주 뛰어나며, 주기 아가씨
는 이와는 정반대로 사람도 크고 말도  크며 성격도 교만하면서 직선적이지만
순박하고 무지한 면이 있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 때리면서 친해지고' 그러면서 은근한 정이 생겨
나게 되었으니, 속칭 <원수가  아니면 만나지 않는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고
하겠다. 시작부터 끝까지 온통 희극적인  맛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서 서로를 보충하고 있으니, 비록 남자는 강하고  여자
는 약한 일반적인 '이상'과는 거리가 멀긴 하지만, 그런대로 어울리는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온갖 우여 곡절을 다 겪으면서 끝내는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된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여어동과 이완지 사이에는  비극적인 맛이 가득하다. 여
어동과 이완지에게는 세가지의 장애가 있었다. 첫째,  여어동은 강호로 망명한
'반도'이고, 이완지는 바로 조정 관리의 '따님'이었다. 둘째, 여어동은 원래 준
수한 모습이었으나 화재를 겪으면서 아주 비참하고 추한 몰골로 변해버렸으며,
얼굴에 가득 생긴 흉터를 영원히 없앨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은 이완지에게도
물론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여어동 자신에게도  엄청난 충격일 수밖에 없었
다. 셋째, 더욱 중요한 점은 여어동의 내심에 있는 심리적인 장애에 있었다. 원
래 그가 내심 반했던 사람은 바로 그와 결의 형제를 맺은 문태래의 부인인 낙
빙이었다. 이런 감정은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었고, 표현할 방법도 없는 것이
었다. 결국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상식에서 벗어나고'
'예의에서 벗어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고, 그 이후부터는 그의 마음이  슬픔과
절망으로 뒤틀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세가지 장애 중에서 한가지만 있다 해도
극복하기 어려운 법인데, 세가지 장애가 앞다투어 생겨나게  되니, <<서검은구
록>의 제18회 <제악무방종가인(除惡無方從佳人)>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여어동은 복수를 위해, 사태에 밀려서 억지로 이완지와 약혼할 수밖에 없게 된
다. 하지만 이 한 쌍의 남녀의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예측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
다 하겠다.
  책 속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애정 문제는  더욱 더 기이하고 슬
프고 비참하여 차마 말하기가 어렵다. 무진도장은 자신이 반한 아가씨에  의해
무정하고도 잔인하게 한 팔을 잘리우고 만다.
  진가락의 어머니와 홍화회의 전대  회주(會主)인 우만정(于萬亭)은 어려서부
터 소꼽친구로 자라났으나, 평생 의지하지 못하고 슬픔 속에서 살아간다.
  원사소와 진정덕의 부인인 관명매 사이에는 수십 년간 거의 미친 듯한 비정
상적인 감정이 얽혀 있었고, 이로 인해 진정덕과 부인 관명매 사이에 수십 년
동안 말다툼이 끊이지 않고 편안한 날이 하루도 없는 고형(苦刑)과  같은 부부
생활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애정 사건들은 하나같이 기괴하면서도 각기  서로 다른 오묘한 부분
을 지니고 있다. 이상에서 예로  든 것 중, 조금이라도  비슷한 경우는 하나도
없다. 가히 <사람에게는 제각기의 길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이 바로 김
용의 창조적 재능을 보여주는 곳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러한 애정 사건의 대부분이  인생의 쓴 맛과 비
극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서, 심지어는 심리가 변질되고 정신이  비뚤어질
정도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점이다. 진실로 <정의 하늘은  꿰메기 어렵고, 한의
바다는 메꾸기가 어렵다(情天難褓,恨海難塡)>고 할 수 있겠다.
 
    四. 시작도 잘못되고 끝도 잘못되다.
  <<서검은구록>>이 진정으로 중점을 두고  묘사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말할 나위 없이 이 책의  주인공인 진가락이라는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 소설의 진정한 예술적 성취 역시 바로 이 한 인물 형상의 묘사에 집중적으
로 나타나고 있다.
  겉보기에 이 인물은 완전히 행운의 상징처럼 보인다.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에 뜻을 품고 문무를 모두 겸비하고 육체와  정신 모두를 함께 수련
했으며, 얼굴은 옥처럼 준수하고, 성품  또한 맑고 고상하고 소탈하며,  심성은
선량하고, 지혜가 많고 남보다 훨씬 총명했다.
  결과적으로 협사가 지닐 수 있는 모든 좋은 점과  모든 행운과 모든 우월함
이 마치 전부 이 한 개인에게 몰려 있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이것은 일반
적인 무협 소설이나 일반적인 문예 소설에서  보이는 표준적인 주인공의 형상
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것은 행운의 상징이 아니라 반대로 한 <불행한 인간>의
상징이요, 비극적인, 정말로 아주 엄청나게 비극적인 형상이었다. 그와 관련 있
는 사람들은 전부가 <시작도 잘못되고 끝도 잘못된> 사람들 뿐이었다. 그리고
<<서검은구록>>의 독특성과 심각성은 바로 이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강남의 귀족이라는  명문 출신으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서(詩書)를
읽어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며, 사부인 원사소는 무림계에서 보기 힘든 고수이
자 이름난 학자였다. 하지만 그의 출신은 어려서부터 어두운 그림자에 둘러 싸
여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일생동안 사랑했던 사람은  원래 그의 아버지인 진각노(陣閣
老)가 아니라 이미 고인이  된 홍화회의 우만정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애정에
얽힌 비극은 줄곧 그의 마음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그의 부모의 애정의 결정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의 어머
니는 그의 아버지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의 탄생은 어쩌면 잘못이었을 수도  있다. 또한 만약 그의 어머니가  그를
강호에 몸 담지 못하게 하고, 다른 명문의 자제들처럼 벼슬길에 나아가게 했더
라면 그는 어쩌면 그의 이러한 행운들이 순리적으로 펼쳐져서 장애 없이 살았
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굳이 그를 옛 애인의 곁으로  보내어
그를 홍화회라는 반역도의 수령인 소타주(小舵主)로 키웠다.
  그의 사부 역시 애정 세계의 비극적이고 불행한 주인공으로, 실의에 빠져 반
쯤은 정신이 나가고 반쯤은 미친 상태로 은거하며 지내던 사람이라, 정신이 억
눌려 있고 마음이 비뚤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암울한 영향은 의심할 여
지 없이 은연중에 그를 감화시키고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심지어 그가 익힌 무술 역시 그의 사부가 실의에  빠진 후 불만을 터뜨리며
지은 백화착권이었으니, 그 중심  되는 뜻은 모두가  다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달라서 상대방의 의표를 찌른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그의 성격과 기질에 영
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으며, 심지어는 그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비극적 인물의 전형이다. 그의 성격과 운명은 모두 '같은 것 같으면서
도 달라서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는' 그런 것이었으며, 비극적인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명문 출신이면서도 강호에 내던져진 신세가 되었으며, 고위층의  신분이었으
면서도 마땅히 있어야 할 지략과 조직 능력이 결핍되어 있었으며, 무예는 고강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쉽게 남을 맹신하여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고,  '영웅적인
업적'과 '여인들과의 사사로운 정' 사이에서 모순을 드러냈으며, 심지어는 '만
청(滿淸)에 반대하는' 정치적 이상을 추구했으면서도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웅
대한 지략을 결핍하고 있는 등의, 온갖 종류의 모순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
다.
  이 모든 것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전부 다  비극적인 성격을 지닌 모순이요
충돌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비극적인 충돌 속에 처하게 된 진가락의 성격과 운
명은 그저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잘못되었다'는  한마디 말로 개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비극적 성격과 운명은 먼저 곽청동과 객사려라는
미인들에 대한 그의 감정과 태도에서 나타나게  된다. 제4회 <치주농환초박노,
환서증검종심정(置酒弄丸招薄怒, 還書贈劒種深情)>에서 '책을 받고  검을 주는
(還書贈劒)'의 과정을 통해 진가락은 곽청동을 처음  보게 되고, 그 순간 사랑
에 빠지게 된다.
  이 책을 <<서검은구록>>이라고 하니, 이 제4회의 <책을 받고 검을 주는> 부
분에서 이미 <주제>를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강호의  이 두 남녀가
이미 애정의 그물에 걸리고 말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진가
락은 이때 이미 또 <잘못>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용은 여기에서 아주 다채로운 <백화착권>과 같은 한 초식을 보여 주고 있
다! 책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이완지는 말을 마치고 인사를 한 후에  말에 올라타고 떠나
          가다가 곽청동의 곁에 이르자 몸을 굽혀  그녀의 어깨를 어루
          만지면서 그녀의 귀에 대고 몇마디 말을 소근거렸다. 곽청동은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완지는 곧 채찍을 한번 휘두르며
          서쪽으로 달려가버렸다.
            진가락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곽청동과 이  잘생
          긴 소년이 이처럼 친밀한  것을 보자 그의 마음  속에 뭐라고
          말하기 힘든 씁쓸함이 느껴져 그는 저도  모르게 멍청히 넋을
          놓고 서 있었다.
           
  단지 이 장면 하나가 진가락이라는 이 청년과 곽청동의 일생에 영향을 끼치
게 된다. 그 원인은 진가락이 남장 여인을 진짜 '잘생긴 소년'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곽청동은 이미 그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
문에 그더러 육비청에게 가서 물어  보라고 시켰다. 하지만 뜻밖에 그는  계속
물어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김용은 그의 수많은 성격상의  약점들
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첫째, 그런 오해를 했다는 것은 그가 '사물에 대한 통
찰력'이 없음을 말해주며, 둘째, 그의 마음이 넓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셋째, 그가 자기 비하(혹은 자만이나 오만)에  빠져 허영심에서 벗어나지 못했
기 때문에, 끝내 묻지 않았던 것임을 알려주고, 넷째, 그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다섯째, 그는
자신의 이러한 의혹 속에서 곽청동이 주는  '결혼을 약속하는 징표'를 받아들
였으며, 여섯째, 그는 근본적으로 곽청동처럼 생동적이고  호방한 기개를 지니
지 못하고 한나라 서생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비겁함과 나약함을 지니고 있었
음을 보여 준다.
  이 애정 관계의 비극은 이완지가  남장을 했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원인을 심각하게 따져 본다면, 실제로는 진가락이라는 이
인물의 성격상, 심리상의 모순과 결함 때문에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
다. 설사 작은 오해가 있었다고는 해도, 그거야 이후에라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제 13회와 제  14회에서, 그는 다시 곽청동의
동생인 객사려(향향공주)에게 반하고 만다! 이로 인해 형세는 더더욱 복잡하게
얽혀 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가락이 객사려를 사랑하게 된  것이 그가 곽청동에게 이
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요, 또 객사려가 세상에서 둘도 없
을 만큼 지나치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며, 또한 객사려가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기대 왔기' 때문인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이 몇가지 원인 외에도 실제로 또 다른 심각한 원인이 있었으니, 그
것은 바로 객사려가 뛰어난 미인이었으면서 무공을 전혀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녀가 진가락에게 더욱 더 적당한 존재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이것 역시 서생(書生)의 '꿈'이자, 남자들의 '자존심'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곽청동은 무공과 지혜가 모두 최고 중의 최고였기 때문에, 이로 인해 진가락은
내심 자기 비하감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애정 세계에 있어서의 진가락은 결코 도량이 넓고 진실하
며, 용감하고, 정열적인 사내 대장부가 아니라, 마음에 동요가 심하고 비겁하며
나약한 일개 서생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근본적으로 스스로 무언가를 추구하고  표현할 만한 용기가 없
으며, 사랑과 고통이 아무리 절실하다고 해도 그저 다른 한인 서생들처럼 <예
법을 엄격하게 따르면서> 그저 마음속으로 고민을 할 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만약 객사려가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기대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진가락은 영원히 자기 마음속의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요, 내심 사
랑하는 여인을 선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객사려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치자. 그런데 하필이면  그녀가
바로 곽청동의 동생일 줄을 그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더욱 비극적인 일
은, 마지막에 가서 그가 건륭황제로  하여금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승낙하도
록 하기 위해 뜻밖에도 사랑하는 여인 객사려를 건륭 황제에게 보내버리고 만
다는 사실이다! 또한 곽청동의  행복을 희생시키고 망가뜨린 후에,  그는 아예
객사려의 아름다우면서도 순정적인 생명을 괴멸시켜  버리고 만다! 이러한 선
택 직전에 그의 마음은 고민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나는 과연 객사려를 위해 건륭 황제와 헤어져야 하는가, 아
          니면 대사를 도모하기 위해 그녀를 타일러 순종하게 만들어야
          하는가?'
            이러한 생각이 번갯불처럼  머리속을 오락가락했다.  이것은
          정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결정이었기 때문에, 그는 정말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
          다.
            '그녀는 나에 대해 아주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날  위해
          서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자기의 순결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내가 분명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
          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이 여인을 버리고 배반할 수 있단 말
          인가? 하지만 객사려와 나, 우리 두 사람의 사랑만을 중시하게
          되면 결국 형님과 헤어져야만 한다. 백 년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한 이러한 복국(復國)의 좋은 기회를 남녀간의 사사로운 정 때
          문에 놓친다면, 우리  두 사람은 천고(千古)의  죄인이 될지도
          모른다.'
            머리속은 어지럽기만 할 뿐,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진가락이 '인문주의자'도 아니요, '애정지상주의자'나 '애인지상주의
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그저 한  명의 한인 서생이자, 한
인 영웅이었을 뿐이다. 그는  <대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일에 구애 받지
않으려고> 했으며, <나라의 일을 중시하고 사사로운  정을 가볍게 여기는> 그
런 사람이었다.
  이에 대해서 우리들은 당연히  질책만 해서도 안되고  진가락만을 탓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그는 비극적인 주인공이었을 뿐이요,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점은 이 비극이 생겨나게 된 진정한 근본 원인과 그 성질에 있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점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홍화회와 여러 호걸들이  엄청난
대가를 치루면서 나라의 원한과 백성들의 원한을 한 몸에 받던 건륭 황제라는
괴수를 죽일 기회를 얻었을 때, 서천굉의 원수인 방유덕이 주기의 아들을 유괴
하여 이로써 협박을 해 오게 되어, 결국 홍화회의 '반청복명'의 웅대한 이상은
이 사소한 일 하나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점이다.
  진가락으로 하여금 <어린 아이를 위해 황제를 죽이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
리게 만든 것은 다른 것에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周)  어르신께서는
홍화회를 위해 주씨 집안의 혈맥을 끊어 버리신 분이며, 이 어린 아이는 그 집
안을 이어갈 핏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객사려를 희생하는> 것에서
<건륭을 죽이려던 계획을 포기하는> 결정 사이의 원인 및 과정은 우리들이 깊
이 생각해 볼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진가락의 소위 <대사(大事)>라는 것은 바로  그의 <반청
복국(反淸復國)>이라는 이상 추구에 있었으나, 이것은 사실  환상과 맹신과 유
치함과 몽매함 등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자, 심각한 비극의 충돌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대업(大業)의 실패는 필연적인 일이었
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끝이 '잘못된' 이유는 그가 '시작부터 잘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개 한인 서생이었을 뿐, 진정한 시대적 영웅이  될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
는 그저 강호의 우두머리였을 뿐, 역사를 창조하거나 바꿀 수 있는 호걸이 아
니었다.
  그는 비겁하고 나약하며 쉽게 맹신에  빠지는 사람이었지, 배후에서 전략을
짜면서 사회를 변혁하고자 노력하는 큰 뜻과 지략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의 비극은 바로 일개 서생의 신분으로 시대적 영웅의  뜻을 펼쳐 보고자 했던
것에 있다. 재야의 우두머리라는 신분으로  역사적인 호걸의 공을 세워보고자
했던 것에 있다. 가슴 속에 웅대한 지략도 품지 못하는 비겁하고 나약한 성격
으로 세상을 변혁시켜 보고자 도모한 것에 바로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이처럼 심각하고 비극적으로 결말이 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며,  중
국 소설에서는 더더욱 보기 힘든 경우이다. 무협 소설의 '상식'과  '전례'에서
는 <큰 공을 세우게 되어 모두가  기뻐하는> 것으로 결말을 짓기 마련이므로,
중국 무협 소설 속에서는 더욱 더 <봉황의 털과 기린의  뿔>처럼 진귀할 수밖
에 없는 일이다. 원한이 있던 사람은 원한을  청산하고, 억울함이 있던 사람은
억울함을 풀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뜻이
있는 사람은 큰 공과 업적을 세우는, 그러한 기쁨과 광명으로 결말이 나기 마
련이었다.
  하지만 김용의 무협 소설의 처녀작인 이 <<서검은구록>>은 공공연하게 <새
로운 초식을 독자적으로 창조>하여, <격식에 어긋나게> 쓰고 있다.  이것이 아
마도 바로 김용 소설의 독특한  매력이자, 심각한 의미를 지니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협 소설이라는 세계에 있어서 진가락처럼 이렇게 완전히 비극적인 주인공
은 많지 않다. 그 비극이 주는 사상적인 의의와 예술적인 가치는 무협 소설이
라는 세계를 훨씬 더 초월하고 있다.
   <<서검은구록>>의 결미에는 진가락이 객사려를  위해 지은 비문과  비슷한
한 수의 단가(短歌)가 있다.
 
            많고 많은 근심 걱정, 끝도 없는 재난,
            짧은 노래가 끝나니 밝았던 달조차 이지러지고,
            울창하고 아름다운 성에는 멍든 피가 묻어 있네.
            멍든 피야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것이요,
            핏자국 역시 시간이 흐르면 없어지겠지만,
            한 가닥 향기나는 영혼은 사라지지 않으리!
            한 마리 나비로 환생하리라!
            어찌 그렇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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