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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평론 6) - 녹정기(鹿鼎記)>>

kcyland 2016.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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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武)도 협(俠)도 아니고, 역사이면서도 기이한 이야기
   -<<녹정기(鹿鼎記)>>
  
   <<녹정기(鹿鼎記)>>는 김용이 최후로 쓴 무협  소설이다. 비록 쓰기 시
 작한 것은 <<월녀검(越女劍)>>보다 2개월 정도 빠르지만, 완전히 마친 것
 은 <<월녀검>>보다 2년이나 늦는다. 동시에 김용의 가장 긴 무협 소설로,
 <<설산비호(雪山飛狐)>>보다 열 배나 더 길다.
   김용은 그의 소설은 '장편이 중단편보다 낫고, 후기작이 전기작보다 낫
 다'고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길면 길수록,  뒤로 가면 갈수록 낫다'
 는 말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 <<녹정기>>는  가장 길고, 또 최후의 작품
 이기 때문에 바로 그의 작품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서술한 바
 와 같이 이 작품은 걸출하면서도 절정에 오른  작품이다. 이 말은 진실이
 다.
  
   一. 非武非俠, 亦史亦奇.
  
   이 <<녹정기>>의 오묘함은 '사불상(四不象)'에 있다.  김용은 1981년 6
 월 22일 <<녹정기>>의 후기를 직접 썼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 소설을 신문에 연재할 때, 끊임없이 독자들이 편지를 보내와 이렇게
 물었다.
   "<<녹정기>>는 다른 사람이 대신 쓴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그렇게 물은 것은 녹정기가 과거의 내 작품과 아주 다르다는 것
 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소설은 당연히 전부 내가 직접 쓴 것이
 다. 나는 독자들이 나의 작품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주고 나를 사랑하고
 격려하는 데 대해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나의 어떤 작
 품이나, 혹은 어떤 대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이건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고 판단 내린다. 좋은 평가는 내게 내리고, 만족하지 않을 때는 마
 음 속으로 정해  놓은 '대필인(代筆人)'에게 돌리곤  한다. <<녹정기>>는
 이전의 나의 무협 소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일부러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의 작가는 자기의 고정된 풍격과 형식에 얽매이면 안 되며 부단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 <<녹정기>>는 세상에 둘도 없을 새로운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사
 불상(四不象)'이라는 것은 그것이 무(武)도 협(俠)도 아니고, 역사이면서도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혹은 '무(武)도 없고  협(俠)도 없으며, 역사도
 아니고 기이한 이야기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무협 소설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그 안에는 반드시 '무(武)'와 '협(俠)'
 이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일찍부터 습관이 들어 있다.  무협, 무
 협하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긴, 그렇지 않다면 어찌 '무협 소설'이라고 부
 를 수 있겠는가? 물론 어떤 '보수적'인,  혹은 '개혁적'인 관점과 이론으
 로 본다면 무협 소설에 반드시 무(武)와 협(俠)이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
 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두가지 파벌로 나뉠 수 있으니, 하나는 '협파(俠派)'
 로 '차라리 무예가 없으면 없을지언정 협의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
 하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무파(武派)'로 '협의가 없으면  없을지언정 무
 예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무협 소설의 대가인 양우생(梁羽生) 선생은 '협의가 없어서는 안 되는'
 파를 대표하며, 다른 무협 소설의 대가인 고룡(古龍) 선생은 '무예가 없어
 서는 안 되는' 파를 대표한다.  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양우생  선생의
 무협 소설에도 당연히 '협(俠)'이 있을 뿐더러 무예 또한 보이고, 고룡 선
 생의 소설에도 물론 '무(武)'도 있거니와 동시에 <<소리비도(小李飛刀)>>
 의 이심환(李尋歡),  <<변성랑자(邊城浪子)>>의 엽개(葉開),  <<천애명월도
 (天涯明月刀)>>의 부홍설(傅紅雪) 같은 협객들이 형상화  되었다. 다만 고
 룡 선생이 그려내는 '협객'은  전통적이거나 성실한 정격(正格)의 형상이
 아니라, 육소봉(陸小鳳)이나 양범(楊凡)처럼 여자들을 좋아하고 대부분 술
 을 목숨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 뿐이다.
   진정코 '협(俠)은 없고 무(武)만 있는' 혹은 '무(武)는 없고 협(俠)만 있
 는' 소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무(武)도  있고 협(俠)도 있으나, 제
 각기 좋아하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 중심을 두고 편중되는  부분이
 차이가 날 뿐이다.
   '무(武)도 없고 협(俠)도 없는' 무협  소설이란, 얼핏 들으면 누군가 반
 박하기 위해 지어낸 황당무계한 헛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녹정기>>의
 주인공인 위소보(韋小寶)가 바로 그러하다.
   위소보는 어떤 무공도 할 줄 모르고 협의에  대해 말하지도 못한다. 비
 록 그 밖의 인물들은 혹은 무예를 할 줄 알기도 하고(강희(康熙) 황제까지
 도 할 줄 아니까),  또 천지회(天地會)의 군웅들처럼  협의가 있는 모습도
 보이긴 하지만, 그건 책 중에 아주 잠깐 잠깐 형상화될 뿐이다.
   당연히, 책의 주인공인 위소보가 무공을 전혀 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
 다. 오히려 그가 만난 사람 중 많은 자들이 최고의 고수들이었다. 태감(太
 監)인 해대부(海大富), 천지회의 총타주(總舵主)인  진근남(陳近南), 독비신
 니(獨臂神尼) 등...
   이 사람들을 위소보는 모두 정식 사부로 모셨고, 신룡교(神龍敎)의 홍안
 통(洪安通) 교주와 그 부인인 소전 또한 각각 위소보에게  '영웅삼초(英雄
 三招)'와 '미인삼초(美人三招)'를 전수해 주었다. 소림사의  방장(方丈) 회
 총(晦聰), 장로인 징관대사(澄觀大師) 등등 역시 모두  위소보(이때는 소림
 사의 제자인 '회명'이었음)에게 무예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믿기 어렵게도 위소보의 무공은 시종 '입문 이전의 단계'에  머
 물고 있을 뿐이었다. 배운 것 중  그나마 가장 나은 것은 '신행백변(神行
 百變)'의 경공술이었으나 그것도 '신행(神行)'이라고 말할 정도까지는  아
 니었고, '백변(百變)' 혹은 '백도(百逃)'를 조금 이해했을 뿐이었다.
   위소보는 천성적으로 무공을  좋아하지 않았고, 가장  잘하는 재주로는
 석회가루를 뿌리거나, 탁상 밑으로 숨어들거나,  다리를 껴안고 뒹굴거나,
 혹은 기회를 봐서 다른 사람의 고환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 등이다.
   '무(武)가 없음'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협(俠)이 있는지'
 에 대해서도 그저 '있는 듯, 없는 듯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위소보의 특징 가운데 '무예를 못한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
 마 '협의가 없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정치관은 '반명(反明)'이면서  또 '반청(反淸)'이었다. 궁정에서는
 충성심 강한 소태감(小太監)이자  대신이었고,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목
 표로 삼는 천지회에서는 자유로운 청목당(靑木堂)의 '위향주(香生主)'이었
 다.
   그의 '도덕심'은 정(正)인 것 같기도 하고 사(邪)인 것 같기도 했다. 황
 제에게 충성을 말할 때는 때때로 잔재주를 부렸고, 천지회에서 의기(義氣)
 를 말할 때는 상황을 봐 가면서 융통성을  발휘했다. 물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적이 없었으며, 삶에 매달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아첨하며 임기응
 변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바로 그가 가장  잘 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협(俠)'에 대해서는 전혀 말할거리가 없고, 또 '의(義)'에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모두 연극 속에서 보고 들었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녹정기>>는 이러한 인물의 인생 이야기를 쓴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武)도 없고 협(俠)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무(武)인 것 같으나 무(武)가 아니고, 협(俠)인 것  같으나 협(俠)이 아니'
 라고 말할 수 있겠다.  겉모습은 그럴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김용 자신이 <<후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녹정기>>는 이미 여타의 무협 소설과는 좀 다르며, 차라리 역사 소설이
 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라고. 작가의 말을 믿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
 렇다고 전부 믿을 수도 없다.
   김용은 이 <<녹정기>>가 '여타의 무협  소설과는 좀 다르다'고 했는데
 이 말은 믿을 만하다. 그러나 '차라리 역사  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낫
 겠다'는 말은 최소한 전부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
 소설은 역사인 것 같기도 하고  전기(傳奇)인 것 같기도 하고,  역사 같은
 전기이기도 하고, 전기 같은 역사이기도 하다. 만일 이것을 완전한  '역사
 소설'이라고 말한다면 이 말을 긍정하기에는 좀 불합당한 면이 있을 것이
 다.
   소설 주인공의 말이나 행동이 상식을 벗어나 보통 사람은 생각해 낼 수
 도 없는 그런 인생 역정과 공적은 분명 기이하면서도 기이한  금시초문의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섭정  여왕 소비아(索菲亞)와의 애정이나, 그
 가 주관하여 맺은 러시아와의 첫번째 국경 조약(중국과 외국 사이의 역사
 상 첫번째 정식 조약이기도 한)이었던 <<네르친스크 조약>> 등등은 역사
 속에서 그와 관련된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순치(順治) 황제가 출
 가하여 스님이 되었다던가, 황태후가 원래는 모문룡(毛文龍)의  딸인 모동
 주(毛東珠)가 변장했었던 것이라든지, 강희 황제가 '무예를 할 줄 알았다'
 든지 하는 일들은 '야사(野史)'나 '전기'속에서 당연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기(傳奇)'라고 할지라도 소설의 제일 첫  장에 '문
 자옥(文字獄)'과 관련되어 나오는  내용은 기본적으로 역사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또한  강희가 대만을 평정했다던가, 오삼계(吳三桂)
 의 반란을 제압했다던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었다든가 하는 것들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다.
   강희 황제는 선왕인 순치의 명령을 받고 대신 오배(鰲拜)를 살해했는데,
 비록 위소보가 그 일에 반드시 관여했었던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쨌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듯 보통 사람은 생각지도 못하는 줄거리  속에서
 우리들은 '역사란 확실히 있었던 일이구나'라고 탄복하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이 '역사'가 '역사적 사건'과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미  별
 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녹정기>>가  '역사이면서
 기이한 이야기', 역사 같기도 하고 기이한 일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으
 면서도 그런 것 같은 이야기라고  절충적으로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
 싶다.
   일반 무협 소설의 '실제인 것 같으면서도 아닌' 성질과는 반대되는  것
 이다.
   무(武)도 있고 협(俠)도 있고  역사 같기도 하고 기이한  이야기인 듯한
 것을 '사불상'이라고 한다. <<녹정기>>의  독창성과 정묘한 부분이  바로
 이 '사불상'에 있다.
   '역사'와 '전기'는 확실히 김용의 소설 속에서 잘 결합되는 두  요소이
 다. 소설의 전기의 외적인 역사 배경은 상당히 진실하며 믿을만하게 보이
 고, 역사 배경 아래의 전기는 아주 다채로우면서도 심각하다.
   '역사'와 '전기'가 하나로 합쳐져, 김용의  독특한 소설 형식을 이룬다
 는 점은 다른 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하지만, 그런 소설들 속에서
 역사와 전기는 결국 그래도 나뉘어 지게 된다.
   역사는 어쩔 수없이 역사이며, 전기는 전기인 것이다. 비록 역사가  '전
 기화(傳奇化)' 되는 속에 그 진실성이 증가되기는 하지만, 역사 자체를 놓
 고 볼 때는 진정 새로운 각도와 믿음과 심각성을 증가시켜 준다고 볼  수
 는 없다.
   하지만 이 <<녹정기>>는 바로 '전기가 역사화 되는' 소설이기  때문에,
 전기이면서도 아주 심각한 역사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녹정기>>는 김용의 가장 독특하고 가장 심각하면서도 가장 성공적인
 사시(史詩)성의 작품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그의 작가적 재능이 집대성
 된 작품이다. 역사적 동화이면서 우화라고 말할 수 있는 동시에 현대주의
 의 반영웅주의적인 민족사시(民族史詩)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아주  기이하면서도 독특하게 보이지만,  '사불상'은 반대로
 아주 미묘하면서도 아주 진실하다. 표면상으로  보면 가장 '낭만적'인 듯
 하지만, 사실은 아주 엄격하다.
   모든 것이 한 편의 길고 해학적이고 황당하고  익살과 농담이 섞인, 유
 머스럽고 재치 있는 희극 같이  보이지만, 이면(裏面)을 보면 박대정심(博
 大精心)하고 장중하고 고아하고 엄숙하면서도 깊은 비극을 내포한 역사시
 이다.
   '고전주의'이면서 '낭만주의'이고, '현실주의'이면서  또한 '현대주의'
 인 전기이자 역사인 것이니, 그야말로 아주 통속적이면서도 고아하고,  기
 이하면서도 진실함에 이르렀다 하겠다.  가장 높고, 지극하며, 가장  깊고,
 가장 넓고, 가장 자유스럽고, 가장 엄격한 예술적, 역사적, 철학적  '경지'
 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선조들이 쓴 고전성을 지닌 영웅의 사시(史詩)는 언제나 이상화된 동화
 혹은 신화의 색채를 면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그것을 한 민족의
 '동화' 내지는 '신화'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역사시의 탄생은 묘하게도  그 민족과 인류의 '유년  시대'에
 일어나며,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항상 현실과 이상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인간과 신, 영웅과 신은 더더욱 잘 구분하지  못하던 시대에 발생하기 때
 문이다.
   그 중 영웅의 성격 및 그들의 전기 고사와 관계 있는 부분은  자유로운
 예술적 상상과   창조라고 하기보다는  비자각적인 원시사유(原始思惟)의
 '집체적인 표상', 또는 비자각적인 이상화, 개념화, 동화와 신화의 연역이
 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어드>>와 <<오딧세
 이>>는 민족의 이상화된 인격을 담은 신화의 집체적인 표현이다.
   중국의 무협 소설 중의 협객과 영웅은 자연스럽게 동화화 되고  신화화
 된 것들이다. 협객과 영웅은 이러한 명확한 경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
 라, 심지어는 무협 소설의 '기본 법칙'이 되어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작가가 창작하는 데 있어서의  기본 법칙일 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읽고
 감상하는데 있어 약속이 되는 전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심미적 정세(定
 勢)'라고 칭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창작하고 읽는 문제에 있어서의  '심미적 정세'는 역사의 진실
 을 표현하고 역사와 인성간의 진상을 보이는데 있어서는 아주 완고한  심
 리적, 문화적 장애를 가져온다. 이것이 바로 많은 무협 소설이  '대아지당
 (大雅之堂)'에 오르지 못하는 원인일 것이며, 몇몇 사람들이  무협 소설을
 '수준 미달'이라고 생각하는 근거일 것이다. 김용은 <<녹정기>>의 후기에
 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소설의 인물이 만약 완전하다면, 진실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 소설은 사
 회를 반영하는 것인데, 현실  사회 중에는 절대로  완전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소설은 결코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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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이치 자체는 아주 간단한 것일 것이나,  무협 소설 세계 속에선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우기 <<녹정기>> 중의 위소보는 그냥 '완전하지  못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매우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지 않은가!
   <<녹정기>>에서 위소보는 절대로 강희 시대의 '시대적 영웅'이 아니라,
 중화 민족 가운데서 '가장 못난 중국인'이다.
  
   二. 기녀원에서 궁정으로.
  
   위소보가 이 <<녹정기>>라는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모십팔(茅十八)을 구한 것은, 위소보가 의협에 대해 논하며 모십팔이 비록
 천지회 중의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호한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는 인물
 이라고 생각했던 원인 외에도 더더욱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혜에 보답하는' 이야기는 희극이나 이야기꾼들의 이야기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위소보도 아주  익숙해 있던 터였다. 이것은  바로
 중국 문화의 정수 중 하나이다.
   위소보가 일생 동안 부귀 영화를 누렸던 것은 사실 모십팔의  덕택이었
 다. 생각해 보라. 그때 만약 모십팔이  그를 데리고 북경(北京)에 가지 않
 았다면, 위소보가 어찌 벼락 출세하여 관직을 얻고 재산을 벌며,  온갖 부
 귀 영화를 누릴 수  있었겠는가? 양주에서 북경으로, 기녀원에서  궁궐로,
 이것은 위소보 일생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고, 이러한 전환점이 있게
 된 것은 바로 모십팔이 양주(揚州)의 기녀원에서  위소보와 알게 되어 그
 를 데리고 북경으로 갔으며, 또한 두 사람이  함께 궁궐에 잡혀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위소보는 모십팔의 '은혜'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든  '보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위소보의 부귀 영화를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도와주
 므로' 그렇게 된 것이라 말한다 해도, 그의  벼락 출세는 그때 당시의 모
 십팔의 입은 거칠어도 악의는 없던 행동거지와, 운이 따라 하늘의 뜻대로
 그를 '소백룡(小白龍)'으로 바꾸어 놓은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모십팔을 구한 이 사건은 당연히 일생 중(일생이라 해봤자 실제는 그저
 소년 시절에서 청년 시절에 이르는 짧은 몇년 사이의 일이었지만) 무수한
 엄청난 대 사건을 저질렀던 위소보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었다. 자질구레
 한 일에 불과할 뿐이니 더이상 언급하지는 않겠다.
   위소보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기회는 바로 기녀원에서 궁궐로 간 것이
 었다.
   생각해 보라! 만약  궁정에 가지 않았다면,  적어도 기녀원에서 태어난
 위소보라는 낯 두껍고 수치를 모르는 녀석이 무슨 쓸모가 있었겠는가? 그
 저 일개 시정잡배이자 무뢰배이며 비열한  잡종 녀석에 불과했을 것이다.
 거꾸로, 만약 그가 기녀원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세상 물정을 알고'(이
 말은 아주 중요하니  단단히 기억해 주시압!)  부끄러움과 수치를 모르며
 교활한 백변(百變:그가 지닌 유일한  무공 이름이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백번씩 변하며 임기 응변에 능하다는 뜻이기도 함)의 수련을 쌓아 궁궐에
 들어갔다 해도 헛수고에 불과했을 것이며, 도리어 태감 해대부에 의해 진
 작 살해되고 말았을 것이다.  살해되지는 않았다 해도  최소한 한낱 가짜
 소태감에 불과했을 것이며, 그가 가짜 태감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날엔 결
 국 죽음을 맞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위소보는 마침 기녀원에서 태어나 궁궐에 들어갔던 것이다.  비
 록 그에게도 조금은 놀랍게 느껴지는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 '놀라운
 위소보'에게는 그다지 대단한 일이 못 되었다.
   그러니 위소보의 생애는 완전히 순풍에 돛단 듯, 조금의 허술함도 없이
 엄청난 부귀 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필연적인 일
 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녀원과 궁궐은 이 세상에서 위소보가 생활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
 다. 이 두 곳이 전천후로 상호 연관되어 위소보를 경악할만한 '시대적 영
 웅'으로 성장시켰던 것이다. 기녀원은  그 기초 과정이었고, 궁궐은  고급
 과정과 마찬가지였다.
   기녀원과 궁궐은 외부 사람들이 볼 때는 자연히 천양지차로 다른  곳이
 며, 서로 조금의 관계도 없고, 함께 논할 수조차 없는 두 곳으로 생각되어
 질 것이다. 하지만 <<녹정기>>의 주인공 위소보의 눈에는 두 곳이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녹정기>>를 보면 위소보가 처음으로 궁정에 들어갔을 때, 이때  그는
 아직 그 곳이 황궁인지를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된
 다.
  
   @
   정원과 화원을 가로 질러 계속 회랑(복도)를 걸어갔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이 집의 주인은 정말 돈이 많은가 보군, 이렇게 큰 집을  짓다
 니.'
   날아갈 듯한 처마 아래의 서까래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기둥과 대
 들보에도 꽃을 조각해 놓은 것이 보였다. 그는  일생 동안 이렇게 화려하
 고 사치스런 집을 본 적이 없었다. 속으로 또 생각했다.
   '우리 여춘원(麗春院)은 양주에서 그래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아름다운
 집인데, 이곳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지겠구나. 이 곳에 기녀원을 지으면 손
 님들이 모두 좋아하겠는걸. 이렇게 큰 집에 백  명이 넘는 아가씨들을 가
 득 채우지 않는다면 그거야 말로 꼴불견이다.'
   #
   
   당연히 이 때 위소보는 궁정을 기원으로 생각했으며 기껏해야  '모습이
 비슷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위소보의 무지가 드러나 보이고 있다.
   흔히 하는 말로 '바보가 대담하다'고 하지 않는가. 만일 위소보가 태감
 의 복색과 궁궐과 기녀원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하지 않았
 다면, 그는 아마 놀라서 혼비백산하여 큰 복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모습이 비슷하다'고 느낀 것도 아무런 계산 없이 그저 그의 엉터
 리 같은 생각에서 나왔을 뿐이었다.
   궁중에 노름의 즐거움이 있으리라는 것을 위소보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궁궐이 양주의 기녀원보다 약간 더 나은 것  같다고 보았을 뿐이다. 더우
 기 '공짜밥(白食)'을 먹을 수  있었고(원래는 임금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것이었지만), 또한 뜻밖에 싸움을 벌이게 되어(그는 그때  그와 싸운 상대
 방인 '소현자'가 바로 당시의 임금인 현엽(玄燁)  강희 황제일 줄은 꿈에
 도 모르고 있었음) 위소보로 하여금 즐거움에 겨워  모든 걸 잊게 만들고
 말았다.
   생각해 보라.  노름은 '즐거움'이요,  공짜밥은 '먹을  것'이요, 싸움은
 '놀이'인데, 이 세가지가 다  있으니 위소보가 어찌  생기가 넘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소현자'가 바로 '당금  황제'인 강희라는  사실을 위소보가  발견했을
 때, 원래는 놀라 도망쳐야 정상이었겠지만, 우선 그는 소현자와  싸우면서
 정이 들었고, 또한 좋은 운이  트여 벼락 출세를 할  기회가 왔기 때문에
 그는 도망치지 않게 된다.
   위소보의 일생에 걸친 '혁혁한 업적들'은 강희를 도와 오배를 죽이면서
 시작된다. 이 사건의 지대한 영향으로 마침내 천하에 이름을 날려 청사에
 길이 남게 되리라고 위소보는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가 이런 불세출의 뛰어난 공적을 세우게 된 것은 완전히 그가 양주의
 기녀원에서 살면서 세상살이에 익숙했던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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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소보는 사태가 위급한 것을 보고 향로에서 재를 두 줌 집어 오배에게
 뿌렸다. 향로의 재는 아주 고와서 오배의 두 눈에 들어가자 마자 즉시 눈
 속에 퍼져나갔다. 오배는 왼팔에 통증을 느꼈다. 위소보가 비수를  던졌는
 데 그의 가슴의 급소를 찌르지 못하고 그의 팔에 꽂혔던 것이다.
   이 때 서재의 책상은 뒤집어져 마구 나뒹굴어 있었는데 위소보는  오배
 의 등 뒤에 평소 황제가 앉던  의자가 있는 것을 보고 힘껏 청동  향로를
 쳐들고 의자 위로 뛰어올라가 오배의 뒤통수를 겨냥해서 있는 있는  힘을
 다해 내려쳤다.
   이 향로는 당나라 때의 물건으로 적어도 30근은 족히 나가는  물건이었
 다. 오배는 그 향로를 보지 못하여 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퍽,하는 소리와
 함께 정수리를 얻어 맞고 말았다.
   오배는 몸을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향로
 는 깨졌으나 뜻밖에 오배의 머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강희가 크게 기뻐하며 소리질렀다.
   "소계자(小桂子), 정말 잘했다."
   그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우근(牛筋)과 밧줄을  넘어져 있는 책상에서
 재빨리 꺼내어 위소보와 함께 오배의 손발을 묶었다.
   위소보는 놀라서 온 몸에 식은 땀을 흘리며  손발을 떨고 있었다. 밧줄
 을 묶는데도 힘을 쓸 수 없었다. 강희와 그는 서로 서로 쳐다보면서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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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행동은 강호의 영웅 호걸들은 거의가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언
 젠가 위소보는 모십팔을 도와야겠다는 성실한 마음으로 석회를 사들고 돌
 아와 관리 사송(史松)의 눈에 뿌려 모십팔의 목숨을  한 번 구한 적이 있
 었다. 그러나 모십팔은 조금도 고마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생
 각하면 할수록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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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석회를 눈에 뿌리는 등 비열한 짓을 곧잘 하는데 그와 같은 짓은
 강호의 사람들이 가장 멸시하는 행위란 말야. 몽약을 탄다던가, 정신을 잃
 게 하는 향을 태우는 것보다도 더 못난  짓거리란 말이다. 사송에게 죽을
 지언정 그런 비열한 수단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네 녀
 석을 보면 볼수록 난 화가 난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석회를 사람의  눈에 뿌려대는 것이 강호에서  가장
 비열한 짓으로 영웅 호걸이 할 행동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전 탁자 밑으로 들어가 발과 다리를 찍어댔으니 그것도 결코 영광스런 일
 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십팔을 바라보자  수치가 분노로 변하여
 매섭게 말했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석회로 사람을 죽이
 는 것도 죽이는 것인데 뭐가 비열하단 말야? 만약 내가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당신은 벌써 귀신이 되었을걸?  당신은 허벅지에
 상처를 입었어. 그들이 당신의 허벅지를 치는 것이나 내가 그들의 다리를
 치는 것이 뭐가 다르단 말야? 나를 북경으로 데리고 가기 싫으면 서로 다
 른 길로 가면 돼. 앞으로는 길을 가다가 만나도 서로 모르는 것으로 하자
 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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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소보는 그의 강호의 도의(道義)를 따지지  않는 '하류'의 '목적을 이
 루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런 행동이 뜻밖에도 궁중에서
 아주 도움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궁중에서는 그에게 천박하다느니, 부끄러움을  모른다느니, 하류라느니,
 무뢰한이라느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도리어 과장된 칭
 찬만을 들었다.
   그는 강호의 영웅 호한도  아니었고 그들처럼 될  수도 없었지만, 결국
 청사에 이름을 남기고, 천하에서 유명한 역사적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고, 무슨 강호의 도의니,  상류니
 하류니, 수치심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을 따지지 않는 것,  아마도 이것
 이 바로 궁중과 기녀원이 서로 똑같은 부분일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위소보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상황을 봐서 행동
 하는 것, 거짓말하고 사기  치는 것, 허풍 떨고  아첨하는 것, 아무렇게나
 맹세하고 약속하는 것, 몰래 훔치는 것,  엎친 위에 덮치는 것 등과  같은
 기녀원에서 배운 것을 궁정에서 유감없이 펼쳐 보일 수 있었으며, 더군다
 나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상승가도를 타고 벼락 출세길에 올라 이
 름을 청사에 날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바로 외부 사람이 보기에는 신비하고 장중한 궁중이, 사실은 기
 녀원과 마찬가지로 더럽고 부패되어 있으며 천하고 수치를 모르고 타락되
 고 허위가 가득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기녀원의 '매매'는  돈으로
 육체를 사고, 육체로 돈을 얻는 것이고, 이 곳은 신체나 인격으로 돈을 얻
 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얻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천박
 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며 온갖 수단을 다 쓰는 곳이 바로 궁중이었다.
   우리들 자신을 양주의 여춘원의  기녀 위춘방(韋春芳)의 아들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자. 무뢰한 시정 잡배인 위소보라는  이 인물이 신비하고 삼
 엄하며 장중하고 고아한 조정의 황궁에 들어갔을 때 우리들의 봉건  왕조
 의 모든 신비감과 역사의 장중함은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들을 조금의 학문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위소보라고 생각해 보자.
 왕조의 궁정 안에서 커다란 은혜를 입어 조정의 대들보가 되고  벼락출세
 를 하고 '역사를 창조하는' 때가  되었을 때 우리들은 봉건 왕조의  역사
 및 그 가치의 엄숙성과 소위 '필연적인 규율' 등등에 대해 매우 깊은  회
 의를 느끼게 될 것이다. <<녹정기>>의 의의와 가치는 바로 이러한 부분에
 있다.
   위소보의 성공의 비결은 그저 아래의 몇가지에 불과할 뿐이다. 첫째, 궁
 중을 기녀원이라고 생각한 점. 둘째, 정치  무대를 익살과 농담, 임기응변
 으로 가득한 도박장과 연극판이라고 생각한 점. 셋째, 무식하고 수단 방법
 을 가리지 않고 부끄러움과 수치를 모른다는 점.  이런 이유 때문에 위소
 보는 아주 순조롭게 일이 풀려 나갔던 것이다.
   궁중은 바로 부귀롭고 영화롭고 고아하고 장엄하게 장식된 속에 더러움
 과 음탕함과 타락함을 숨겨 둔 고급 기녀원이다.  정치 무대는 바로 그럴
 듯하게 꾸민, 도둑들이 설치고 사리 사욕을 꾀하며 부정을 저지르고, 윗사
 람과 아랫사람이 서로서로 속고 속이는 큰 도박장이다.
   역사적 운명과 역사의 선택은 항상 어떤 사람들의 도박과 내기이며, 동
 시에 그들이 만들어 낸 온갖 추태와 익살과 농담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포
 장하여 만들어낸 한 편의 희극인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새로운 시각이다. 중국의  봉건 사회의 흑막, 특히  봉건
 왕조의 궁중의 흑막은 바로 이러한 유머와 이질적이고 특이한 시각이  있
 어야만 꿰뚫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신기하고  황당한 필법이 있어야만 묘
 사해 낼 수 있다. 따라서 <<녹정기>>의 위소보에 얽힌 모든 이야기와  모
 든 견문은 '본질적인 진실'일 뿐만 아니라, 자연히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다.
   이것은 바로 중국 정치 역사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바
 로 중국 정치 이론과 그 도덕 문화의 가장 심층적인 부분이다. 따라서 위
 소보는 진정한 '시대적 영웅'이며 더불어 '민족의 정령이자 모태'라고 볼
 수 있다.
  
   三. 황제와 건달
  
   여기서의 황제란 강희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사실  이 책의 두번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건달은 물론 위소보를 가리키는 말이다.
   강희 황제는 <<녹정기>> 속에 가장 성공적으로 묘사된 전형 가운데 하
 나이다. 그의 웅대한 지략, 현명함, 후덕함, 지혜,  이성 등등이 정말 자연
 스럽게 묘사되어 있으며, 소설 속에서  선명하게 생동적으로 부각되어 있
 다.
   오배를 죽이고 조정을 깨끗이 하고,  대만을 수복하고 오삼계의 반란을
 평정하고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수립한  것에서부터, 인재를 적재 적소에
 등용하고 한족의 영웅들을 제사지내고 양주에 3년 동안 세금을  면제시키
 고 대만의 이재민들을 구제하는 등등의 그의 모든 역사적 공적이 전부 자
 세히 잘 표현되어 있다. 더군다나 그의 높은 학식, 현명함, 공부를 좋아하
 는 성품, 똑똑함, 강한 주체성, 실사구시의 정신 등등이 모두 아주 생동적
 으로 쓰여 있다.
   여기에서는 그것들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한족(漢
 族)의 대학자인 황종희(黃宗羲)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이라는 책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지나친 영민함을 잘 알 수  있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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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 황제가 책상 위에서 책을 한 권 집어 들면서 말했다.
   "절강(浙江)의 순무(巡撫)가 한 권의  책을 올렸는데 <<명이대방록>>이
 라고 하는 것이네. 이것은 절강 사람인 황여주(黃黎洲)가  새로 쓴 것이라
 하더군. 절강의 순무는 책  가운데 대역무도(大逆無道)한 말이 많이  쓰여
 있으니 엄밀히 조사해야 한다고 했네. 나는 방금  이 책을 보았는데 매우
 도리가 있다고 느껴져 절강의  순무에게 쓸데없는 일을 일으키지  말도록
 지시를 내렸네."
   그는 책을 다시 뒤적이며 말했다.
   "이 책에서는 인군이 천하를 받드는 것이지 천하의 사람들이 한 사람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고 했네. 이 뜻은 매우 훌륭하네.  그는 또 말하기를 '
 천자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고, 천자가 그렇
 지 않다고 하는 것 역시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 역시 매우 옳은 소리야. 사람에게  어찌 과실이 없겠나? 천자 역시
 사람인데 황제가 되었다고 해서 어찌 모든 일에 있어서 옳기만 하고 영원
 히 잘못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강희는 한동안 이야기를 했으나 위소보가  그저 예, 예, 하고  대답하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의혹의 빛을 짙게 띄고 있는 것을 보고 그만 픽  웃으
 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 나이 어린 망나니와 도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니  어찌 그가
 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야기를 더 길게 한다면 그는 아마도 연신 하
 품을 할 것이다.'
   강희는 왼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대는 가 보게."
   그는 오른손으로 여전히 그 책을 들고 소리내어 읽어 내려갔다.
   "천하의 이재에 대한 권리는 모두 나에게서 비롯되고 나는 천하의 이득
 을 모조리 나 자신에게로 돌리고 천하의 해를 모조리 다른 사람에게 돌린
 다 하더라도 아니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만
 을 생각하지 않도록 하고 자기의 이득만을 얻지 못하도록 하라."
   위소보는 그 말을 듣자 더욱 아리송해 질  뿐이었다. 황제가 독서를 하
 고 있으므로 그는 연신 좋다고 칭찬의 말을 했다. 어찌 이와 같은 기회에
 황상을 치켜 세우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강희는 책을 내려놓
 았다.
   위소보는 슬쩍 물었다.
   "황상, 그런데 그 책 속에서는 무슨 말을  하고 있으며 어떤 점이 그리
 좋다는 것입니까?"
   강희가 말했다.
   "황제가 되는 사람은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사사롭게 자기만을  위하
 도록 하지 말고 자기만의 이득을 취하지 말도록 하라 했네. 황제 한 사람
 만이 사사로운 욕심을 내고 이득을 취한다면 이것은 황제의 커다란  욕심
 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결코 백성들을 위하는 큰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
 네. 따라서 황제가 처음에는 마음 속으로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고 느끼게
 되어 어느 정도 부끄러움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이러한 일들이
 모두 옳다고 생각되어 다른 사람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
 로잡히게 될 것이라고 충고했네."
   위소보가 말했다.
   "그 사람은 나쁜 황제를 말하고 있군요.  황상께서는 이와 같이 오생어
 탕이시니 (위소보는 무식하고  글자를 몰라 '요순우탕(堯舜禹湯)'을  항상
 '오생어탕(烏生魚湯)'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강희는 그를  놀리느라 그의
 말투를 흉내내었음) 그가 말한 것은 잘못 되었습니다."
   강희가 말했다.
   "허허허, 황제가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 자신이 오생어탕이라고 생
 각하지. 어느 누가 스스로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처럼 폭군이라고 생각
 하겠는가? 더구나 모든 폭군의 곁에는 반드시 많은 공덕을 칭송하는 몰염
 치한 대신이 있어 폭군을 오생어탕으로 받든다네."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황상께서는 진짜 오생어탕이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신이 그
 야말로 몰염치한 대신이 되지 않겠습니까?"
   강희는 왼발을 들어 땅을 한번 구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정말 염치가 좋군. 빨리 꺼지도록 하게."
   #
  
   이 단락의 문장은 강희라는 이 '명군'이자 '대인'의 심리와 성격과  포
 부를 지니고 있음을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예술적인 능력과 사상적
 인 견해, 그리고 심리적인 포부가 약간만 높고  깊고 넓은 사람이라면 이
 러한 문장과 이러한 전형을 써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용의 <<녹정
 기>> 중의 강희의 형상은 바로 '전무후무한' 명군의 전형이며, 더욱 중요
 한 것은 바로 진정으로 전무후무한 황제의 예술적 전형이라는 점에 있다.
   <<녹정기>>의 진정한 독특성과 깊은  공헌은 강희 황제의  '또다른 면
 (진정한 인성과 한 소년의  심리)'을 깊고 생동적으로  그려 냈다는 점에
 있으며, 이 '또다른 면'이 바로 위소보와 유관한 부분이다.
   다시 위소보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자. 그가 북경에 들어간 몇 년 동
 안 아주 운 좋게 벼락출세 하게 된 것은 절묘한 인연과, 황궁을 기녀원으
 로 생각한 등등 물론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관찰력이 뛰어난 독자라
 면 위소보의 모든 기연(奇緣)과 행운의 반은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요, 나
 머지 반은 강희의 덕분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위소보가  만일 '황제가 총애하는  아이'가 아니었더라도
 그가 그처럼 앞길이 트이고 위풍당당하며 순풍에 돛 단 듯이 출세의 길을
 밟아 나갈 수 있었겠는가? 당연히 불가능하다.
   또한 위소보가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아이'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당
 연히 그가 '명령을 받들고 법을 따랐으며' 또한 항상 '용안(임금)을 기쁘
 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소보가 낯 두껍고 수치를 모르며 허풍 떨고  아첨
 하는 천한 소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모
 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외에 더욱 중요하고 더욱 깊은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위소보와 강희 황제 사이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 및 깊은 우정이다.
   이것은 일종의 기이하고 특이하면서도 깊은 우정이다. 현명하고 성스럽
 고 걸출하고 지략이 뛰어난 황제와 무식하고 낯 두껍고 수치를 모르는 건
 달 사이에 뜻밖에도 친밀하면서도 깊은 특수한 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는 점이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일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이다. 책 안에 증거가 있다.
   사실 위소보가 항상 '용안을 기쁘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때 그
 는 '용안을 화나게' 한 적도 있었다.
   예를 들면 강희가 그에게 천지회를  없애 버리라고 했을 때 그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회피했을 뿐 아니라  황제와 흥정하면서 '황상, 그들이
 황상을 해치려고 하는 것을 저는  반대하고 막았습니다. 소신은 그야말로
 황상께 의리를 다했습니다. 황상께서 그들을  잡으려고 하는데 소신이 그
 가운데 낀다면 사람 노릇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로서는 부득이 용서를
 하라고 빌 수밖에 없는데 이 또한 의리를 다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
 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당연히 강희를 매우 화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흥정하면서  은혜
 에 대해 정리(情理)를 구하는  위소보의 태도가 더더욱  '기심가주(其心可
 誅:그 마음씨는 죽음으로써 징벌할 만하다)'하게 생각되었다.(다행히 위소
 보는 '기심가주'가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었음)  그리하여 강희는 천지회
 의 군웅들을 위소보의 집에서 죽게끔 좋은 계획을 짜 두었으나  뜻밖에도
 위소보가 그들을 도망시키고 시위장인 다륭(多隆)을 죽여,  마침내 천지회
 의 사람들을 구하게 된다.
   이 사건이 만일 다른 사람에 의한 것이었다면 백 명이면 백 명  모두와
 그의 일가 친척들까지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을 것이나, 위소보가 한 일인
 지라, 이 영명하고 성스러운 대 황제 강희는 화도 나고 웃음도 나는 심정
 으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저 당하고 있기만 했다.
   위소보가 '통흘도(通吃島)'로 도망갔을 때  강희는 뜻밖에 사람들을 파
 견하여 바다에서 각  섬을 향해 다음과  같이 소리 지르며  그를 찾았다.
 <소계자, 소계자, 어디에 계십니까? 소현자가 당신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마침내 위소보를 찾은 뒤의 장면이 아주 다채로운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
 는데 제5권 제45회에서, 강희는 왕진보(王進寶)  장군과 태감 온유방(溫有
 方) 두 사람으로 하여금(이 두 사람은 위소보와  관계가 두터운 사람들로,
 황제에게 아무런 악의도 없음을 잘 드러내고 있음) 먼저 위소보에게 종이
 한 장을 주도록 하였는데, 그  종이 위에는 강희가 직접  그린 여섯 폭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의 내용은 위소보가 세운 여섯 가지 큰 공적들이었는데 그  중 '최
 고의 공적'은 뜻밖에도 위소보가 당시 강희와 뒹굴며 무예를 겨루는 것이
 었다!
   이것은 또한 강희가 위소보를 찾는 것이 결코 군대를 일으켜 죄를 묻거
 나, '공을 세워 속죄하라'는 등의 그런 의미가 아님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소설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
   위소보는 그와 같은 여섯 폭의 그림을 보고는 그만 멍해져서는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이토록 많은 시간을 허비해 가면서 이런 여섯 폭의  그림을 그리
 고 나의 공로를 기억하고 있다니, 이것은 나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있다
 는 뜻이다.'
   온유방은 한참 동안 기다리더니 말했다.
   "똑똑히 보셨습니까?"
   위소보가 말했다.
   "그렇소."
   온유방은 두번째의 봉투를 뜯고 말했다.
   "황상의 밀지를 선포하겠소."
   그는 한 장의 종이를 꺼내더니 읽어 내려갔다.
   "소계자, 제기랄! 그대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무척  그대가 그립구나.
 그런데 네 녀석은 정도 없고 의리도 없이 나를 잊었단 말이냐?"
   위소보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도 잊지 않았지요. 정말 잊지 않았소이다."
   중국에서 삼황 오제 이래로  황제의 성지 중에 제기랄이라는  상스러운
 말을 쓰고 황제 스스로 나라고 칭한 예는 아무래도 강희의 이 밀지가  처
 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온유방은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읽었다.
   "그대는 나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의 사부를 죽이려 하지 않았으며, 다
 시 건녕(建寧) 공주를 데리고 도망쳤다. 제기랄, 그대의 이와 같은 행동은
 나를 그대의 큰 처남으로 만들자는 수작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의 공
 로는 매우 크고 또한 나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니 어떤 죄를 지었다  하더
 라도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용서했다. 내가 곧 혼례를 올리게 되었는데 그
 대가 와서 축하 술을 먹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즐겁지 않을 게다.
 내가 그대에게 말하건데 그대는 순순히  투항하여 즉시 북경으로 오게나.
 나는 이미 그대를 위해 달리 한 채의 백작부를 지어 놓았는데 옛날  것보
 다 훨씬 크니라."
   위소보는 마음이 놓여 큰 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좋아요, 내 즉시 축하 술을 먹으러 가리다."
   온유방은 계속해서 읽었다.
   "우리 약속은 미리 해두기로 하세. 이후부터 그대가 다시 나의 말을 듣
 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그대의 목을 자를 것이네. 그러나 그대는 내가 그
 대를 속여 북경으로 오라고 해 놓고서 다시 죽이려 한다고는 생각하지 말
 게. 그대의 진씨 성을 가진 사부는 이미 죽었으며, 천지회도  이미 그대와
 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졌으니, 그대는 조금이라고 힘을 써서 천지회를 깨
 끗이 없애 주게. 그러면  내 그대를 다시  파견하여 오삼계를 공격하도록
 하겠네. 이후에는 공이나 왕에 봉하여 벼슬이 오르고  재물을 모을 수 있
 도록 할 테니 그야말로  그대가 즐거워하게 될  것이네. 소현자는 그대의
 절친한 친구이고 그대의 사부이며 오생어탕으로서 한 번 한 말은 죽은 말
 을 타고 뒤쫓아갈 수  없는 노릇(死馬難追)이니 -여기에는 한가지  사연이
 있다. 위소보는 마치 '요순우탕'을 '오생어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
 마난추(駟馬難追:말이 입 밖을 나가면 따라 잡지 못한다. 한번 한 말은 수
 습하기 어렵다는 말)'를 항상 '사마난추(死馬難追:죽은 말을  타고 쫓아가
 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강희는 항상 이 말로  그를 놀리곤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렇게 쓴 것과 또 스스로를 '소현자'라는 싸우던 시절의  이름
 으로 칭한 것은 그가 진실로 우정으로 위소보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나
 타낸 것이다.- 그대는 빨리 빨리 돌아오도록 하게나."
   #
  
   위소보가 이렇듯 큰 죄를 범했는데도 뜻밖에 강희는 이처럼 간단히  용
 서한 것이다. 이러한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내용이 담긴 강희의 이 밀지
 는 많은 문제를 설명해 주고 있다.
   우선 위소보는 무식하여 글자를 모르니 만일 강희가 이 밀지를  평소의
 관례대로 썼다면 위소보는 분명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 이것 역시 강희 성격의 '또다른 면'을 설명해 준다. 이 위엄 있고
 장엄한 황제가 뜻밖에도 '제기랄'이니, '나'라느니  하는 말을 썼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주 자연스럽고 유창하여 정말 생동감이 넘치고 있다.
   셋째, 이것 역시 강희와 위소보의 관계가 특별하고 우정이 깊다는 사실
 을 설명해 준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위소보를 '네 녀석은 정도 없고
 의리도 없이 나를 잊었단 말이냐?'하고 욕을 해댈 수 있으며  또 '그대가
 와서 축하술을 먹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즐겁지 않을  게다'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넷째, 이 '밀지'에는 사실 이미 강희와 위소보의 우정의 부분적인 원인
 과 진상을 설명해 주고 있다. 물론 위소보가 여러 차례 큰 공적을 세웠고
 또 강한 충성심을 받친 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위
 소보와 강희가 바로 '어렸을 적 교분'을 나누고 또 '싸우면서 정이 든 좋
 은 친구'라는 데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강희는 위소
 보라는 인물 앞에서만 유일하게 이처럼 편안하고 쾌활하게 어떠한 법칙이
 나 엄숙함을 따지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제기랄'이니 '나'니  하고
 말할 수 있었기에 인생의 '자유로운 기쁨'을 깊이 누릴 수 있었다는 점이
 다.
   강희는 황제 노릇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무슨 친구가 있을 수 없었고, 진
 정으로 마음이 맞는 친구는 더더욱 있을 수 없었으며 위소보처럼 서로 뒹
 굴고 싸우면서 정이 든 진심 어린 친구는 더더욱 있을 수 없었다.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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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태자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황제가 되어야 한다. 강희
 는 어려서부터 일반 사람과 다르게 자랐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 하
 나를 모든 사람이 주시하기  때문에 조금도 자유가  없었다. 죄수가 옥에
 갇혔다 해도 마음대로 말할 수 있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있다. 그러나
 황제가 받는 구속은 죄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황태자를 가르치는 사람과 시위, 태감, 궁녀들은 혹시나 태자의  건강이
 나빠질까 혹은 몸을 다치지나 않을까 하루 종일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
 다. 그리고 태자의 언행이 조금이라도 경박스러울 때면 스승은 길게 훈계
 의 말을 했다. 태자가 옷차림을 아무렇게나 할라치면 궁녀와 태감들은 큰
 화가 닥치는 것처럼 질색을 했고 태자가 감기라도 들까봐 겁을 냈다.
   사람이 어려서부터 은밀히 감시를  당한다면 세상 살아갈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역사를 살펴 보면 폭군이  많은데 폭군들은 대체로 어렸
 을 때 받은 억압을 증오하며 제멋대로 하고 싶어서 폭군이 된 경우도  적
 지 않을 것이다.
   강희는 어릴 때부터 은밀히 돌보아지고  감시를 받아온 사람이었다. 친
 히 정사를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궁녀와 태감에게 좀 더 멀리 떨어
 져 있으라고 분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신들  앞에서 여전히 나이에 어
 울리지 않게 의젓하게 행동해야 했다.
   궁녀나 태감을 대할 때도 황제는 거드름을 피워야 했으며 함부로  행동
 하지 못했다. 평생 동안 마음껏 웃은 적도 몇 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
 이 어린 소년이 놀고 떠들기 좋아하는 것은 황제나 거지나 다를 바가  없
 었다.
   일반 백성들의 집에서는 어떤 어린이건 누구나 치고 받으며 놀 수 있었
 으나 이 어린  황제가 그렇게  하려면 특별한 인연이  있어야 그와  같은
 '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위소보와 함께 있을 때만 구속을 받지 않고 황제의 거드름을 피우
 지 않고 마음껏 치고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한평생 다시 없는 즐거움이
 었다. 그래서 그는 위소보가 정말 아주 얻기  힘든 진귀한 보물처럼 생각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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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그와 함께 싸우며 놀아 주는 것은 아주 커다란 공로일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하는 것이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강희의 일
 생 중 가장 행복했던 추억은 아마도 위소보와 싸우며 웃고 떠들던 즐거움
 이 아닐까 싶다. 또한 강희가 이전의 황제들이나 혹은 이후의 황제들처럼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는  괴퍅한 성격이나 행동을  보이지 않고, 그처럼
 영특하고 후덕하며 현명하고 재략이 뛰어나며 포부가 넓고 자비롭고 총명
 한 것은 아마도 위소보가  있어서 다른 황태자나 황제들처럼  비인간적인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까놓고  말해서, 위
 소보의 존재는 강희의 정신 건강이나 천성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것  등은
 지극히 중요한 관계가 있다. 다만 다른 어떤 역사가나 혹은 무슨 가(家)들
 은 이 점을 몰랐거나 생각 못했고, 유독 김용이 그의 <<녹정기>>에서  써
 내게 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 <<녹정기>>의 독자는 강희가 위소보에게
 밀지를 내리면서 '제기랄'이니 '나'니 하는 말을 했으나 조금도 이상하게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연스럽게 느낄 것이다.
   강희에게는, 위소보의  '건달적인 습관'이나  '건달적인  성격'은 모두
 '대황제'의 억눌린 마음을 풀어주고 보충해  주는 것이었다. 이렇듯 제멋
 대로 방탕하게 수단 방법도 가리지 않고 말도 가리지 않는  천성이야말로
 강희에게는 아주 부럽기만 한 자유로운 인생의 경지요, 인간의 천성이 도
 달할 수 있는 자유로운 발양(發揚)인 것이었다. 더군다나  위소보의 '건달
 기질'은 원래 '시정 잡배들의 기질'이자, 속된 기질인 동시에, 바로 '생활
 의 기질'이자 '생명의 기질'인 것이다.
   좀 더 깊게 살펴 보면 우리들은 더 많은 내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강
 희와 위소보의 우정은 당연히 소년들의 천성이 서로 통해 '싸우면서 정든
 우정'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강희  황제는 점점 나이를 먹어
 가면서 하루종일 맞붙어 싸우며 즐길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
 으며, 점점 자신이 안고 있는 막중한 부담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동시
 에 나이를 점점 먹어 갔기 때문에, 위엄이  날로 높아지고 자존심이 날로
 강해지게 되었다. 어쩌다가 위소보와 함께 속된 말을 나누는 것은 가능했
 지만, 많이 나눌 수는 없었고, 위소보가 왕을 믿고 교만을 떠는 것은 더더
 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점은 아주 명백한 사실이다. 만약  강희가 하루
 종일 그저 위소보와  헛소리만 주고 받았다면  강희는 강희 대제(大帝)가
 아니라 '강대보(康大寶)'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희와 위소보의
 우정의 더욱 깊음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위소보의 충성심
 이 아주 강직한데다가 여러 차례나 놀라운 공적을 세운 데 있다.
   이것은 위소보가 대단한 '복'을 타고 났음을 설명해 주니, 대부분의 일
 은 항상 흉(兇)이 길(吉)이 되고, 성공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강희
 가 사람을 적재 적소에 잘 사용할 줄 알았다는 점도 더불어 알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연구해 보자. 조정 안에서 능력이 있는 자는 아주 많
 았으며 '충신' 또한 적지 않았는데 어째서 강희는 더욱 믿음직하고  더욱
 능력 있으며 더욱 충성심이  강한 사람을 쓰지  않았을까. 대신들 중에서
 위소보가 반드시 가장 '충성심 강한' 신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위
 향주'이기도 했고 신룡교의 '백룡사'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또한 위소
 보에 비해 더욱 능력 있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 이것은  대단한 비밀이다.
 강희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담겨진 대 비밀이다.(어쩌면 강희 본인 역시 잘
 모르고 있는 일종의 무의식적, 잠재 의식적인 행위였을지도 모르겠음) 강
 희는 매일 위소보를 자신의 '대역'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소설 중에서 강희가 위소보에게 병력을 주어 러시아와 전쟁 하러  보낼
 때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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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며칠 후 강희는 위소보를 궁으로 소환하여 그에게 아주 큰 지
 도를 한 장 주면서 진군하는 방법, 접전하는  방법, 성을 쌓는 방법, 응원
 하는 방법을 하나 하나 상세하게 지시하고  동시에 주필(朱筆)로 지도 위
 에다 나눠서 표시해 주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이번 싸움은 황상께서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싸우는 것이라 소인은 감
 히 아무런 주장도 내세우지 못합니다. 따라서 황상의 분부대로 거행할 것
 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설령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황상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겁니다."
   강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위소보의 이와 같은 얘기는
 그의 속마음과 아주 딱 들어맞았다. 그는 어렸을  때 무예를 배웠지만 도
 무지 펼쳐 보일 수 없어서 오직 위소보와 대련하는게 고작이었다.
   그 후 끊임없이 위소보를 파견하여 임무를 완수하게 했지만 그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는 모두 그  자신이 대신하여 나간 것으로 여기고  있었
 다. 위소보는 나이도 자기보다 어렸고 무공, 지모, 학문, 견식 조차도 자신
 을 따르지 못하는데 그가 성사시킬 수 있다면 자기는 더욱 잘 해낼 수 있
 지 않겠는가? 물론 명나라의 정덕(正德)  황제는 스스로 자신을 위무대장
 군진국공(威武大將軍鎭國公)으로 봉하여 몸소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지만
 그건 단지 적막함을 못  이겨서 자신의 재주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희는 정덕 황제처럼 일처리를 엉망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위소
 보를 파견하여 일처리를 해도 내심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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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것들은 어렸을 적 강희와 함께 싸우며 놀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
 떠한 충성심 있는 신하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강희와 위소
 보의 우정의 더욱 심층적인  원인이며, 강희 성격의  '또다른 면'의 더욱
 깊은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듯, 위소보의 '인성(人性)'은  강희의 인성(人性)과  아주 친근하며,
 위소보의 '신공(神功)' 또한 강희의 신공(神功)의 대역을 맡게 되어, 강희
 라는 이 황제와 위소보라는 이 건달의 우정은 더욱 끊을래야 끊을 수  없
 이 오랫동안 청사에 함께 남게 된 것이다.
   <<녹정기>>가 <<녹정기>>일 수 있는 그 오묘함은 위소보라는 건달  주
 인공의 형상만을 잘 묘사했다던가, 강희  황제의 생동적인 형상만을 그려
 냈다던가 하는 단편적인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소보라는 건달과  강
 희라는 황제를 동시에 함께 잘 묘사해낸 예술 형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
 다.
   위소보와 강희는 확실히 '천양지차'로  보인다. 황제 강희는  하늘이요,
 위소보는 땅이다. 그들은 또한 각각 극단을 달리고 있다.
   소설 속에서 위소보는 '녹(鹿)'이요, 강희 황제는 '정(鼎)'으로 서로 대
 립하면서 특수한 의의를 나타내게 된다.  그 의의는 그들의 '상대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호  보충성'에도 있다. 더욱 깊이  말하자면,
 이 두가지 예술 형상에는  내재적으로 상통하는 비슷한 부분이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강희  황제가 왜 항상  위소보를 자신의 '대역'으로
 삼았겠는가.
   강희 황제가 위소보를 필요로 했던 것은 단지 두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왔기 때문이거나 혹은 황제가 궁 밖을 나가는 것이 불편해서 위
 소보가 대신 한다던가 하는 이유 외에 더욱 깊은 원인과 이유가 있다. 그
 것은 바로 강희가 황제이며,  또 일반적인 황제가  아닌 특별히 현명하고
 능력 있는 황제로, 봉건 통치자의 치술(治術)의 정화(精華)가 집중되어 있
 다는 점에 있다. 내적으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염치 없는 성품도
 가지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예의나 인의 도덕이라는 위선적인 외투와
 신성한 후광을 쓸 수밖에 없었다.
   위소보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염치도 없
 이 행동하는 것은 똑같으나 다만 더욱 적나라하게 표현한다는 차이가  있
 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소보가 강희의 '화신'이 된 것은,  다만 줄
 거리 상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한층  깊은 성격에 있어서의 진
 실된 화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바로  강희의 성격 속에 내
 재한 세계의 한 단면을 대표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인물  형상의 대비와 내재적인 상호 보충  관계는
 소설의 줄거리 속에서만 크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인물 형상 묘
 사의 심각성 위에 커다란 작용을 한다.
   이 두 인물은 출신과 지위, 지혜, 기질, 성격, 이상, 추구 등등이 판이하
 게 차이나며 흑백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둘은 '친구'일
 뿐만 아니라, '한 물체의 양면' 혹은 '한  물체의 양층'의 '동일한 형상'
 이라고 말할 수까지 있다. 그들 사이의 '상호  보충 관계'는 동일한 형상
 의 서로 다른 '화신'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 '화신'의 '원형'은 바로 중국 고대 봉건 문화의 결정체이자  상징이
 다. 그로 인해 강희 황제가 생겨났고, 동시에 위소보가 생겨났다.
   어떤 사람은 그로 인해 강희 황제와 위소보라는 상호 보충적이면서  완
 전한 '원형' 및 서로 다른 화신이 만들어 졌다고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녹정기>>의 근본적인 오묘한 비밀이다. 또한 이것은  바
 로 중국 고대 역사의 근본적인 오묘한 비밀이기도  하다. 이것은 바로 중
 국 고대 문화의 근본적인 오묘한 비밀이기도 하다.
   그들은 역사를 창조했으나 그 이전에  그들은 역사에 의해 창조되었다.
 왕가에서 태어나면 강희 황제 같은 인물이 되고 기녀원에서 태어나면  위
 소보같은 인물이 된다.
   만주족의 청나라 왕실에서 태어나면  강희 황제가 되고 한족의  집에서
 태어나면 위소보가 된다. 강산과 궁전에서 태어나면 강희 황제가 되고 강
 호 녹림에서 태어나면 위소보가  된다. 그들은 동일한  인물의 서로 다른
 화신이다. 그들은 동일한 한 사람, 즉 중국인이다. 그들은 동일한 산물, 즉
 중국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다. 중국의 역사적, 문화적 산물인 것이다.
  
   四. 통흘백(通吃伯)과 녹정공(鹿鼎公)
  
   확실히 강희가 그를 아끼고  사랑하고 총애했기 때문에 위소보는  정말
 쉽게 부귀 영화를 얻고 승진하고  재물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짧은 몇
 년 동안 여러 차례 놀라운  공적을 세워 천지도 놀라고 사람들도  놀라는
 대사(大事)를 이룩한 것은 비단 황제의 은혜가 넓고, 또 그의 복이 많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위소보가 확실히 다른 사람은 미칠 수 없는 대단한
 '신공'을 가진 탓이었다.
   위소보라는 이 기인은 일생의 몇 년 동안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
 을 만큼 기이한 일들을 겪었는데, 더욱 기이한 것은 바로 그가 겪는 나쁜
 일은 모두 좋게 되고, 사지(死地)에서도  극적으로 살아나며, 여러 차례나
 신기한 공적을 세우게 되었다는 점이다.  만일 위소보에게 일어났던 기이
 한 일들이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한 일이었다고 친다면, 그의 신
 기한 공적들은 더더욱 천하 제일이요, 이 세상에  다시 없을 만한 대단한
 일이라 하겠다.
   그가 강희를 위해 세운 공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오
 배를 붙잡은 것. 둘째, 출가한 선왕인 순치 황제를 보호한 것. 셋째,  강희
 황제를 독비신니의 공격에서 구해낸 것. 넷째, 진짜 태후를 찾아내고 가짜
 태후를 내쫓은 것. 다섯째, 러시아 소비아 공주와 외교를 맺고, 몽고 왕자,
 서장의 상길라마와 결의 형제를 맺어 이로써 오삼계가 반역하여 만든  삼
 로군을 무찔러 청나라 조정이 마침내 오삼계를 평정할  수 있도록 한 것.
 여섯째, 신룡교를 공격하여 청나라 조정의 내환을  없앤 것. 일곱째, 가짜
 태후 모동주를 잡아 이로써 다시 한번 태후와 강희를 구한 것. 여덟째, 오
 삼계의 아들 오응웅(吳應熊)을 붙잡아  오삼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것. 아홉째, 대만의 백성들을 잘 다스려 시종 중국의 판도 내에 있게 하였
 으며 또 그 지방 백성들의 칭송을 받은 것. 열째, 강희 대신 출정하여  러
 시아를 선제 공격한 뒤 외교 관계를 맺어 중국 최초의 외교 조약인 <<네
 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중국이 많은 이권을 얻게 하여, 군사상 그리
 고 외교상에 있어 이중의 거대한 승리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점.
   이상의 열가지는 그가 세운 큰 공적일 뿐이며,  평상시 그가 청나라 궁
 전에서 강희와 건녕 공주 등등을 시중든 일은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정도
 이다.
   하지만, 이상의 이러한 것들은 위소보의  부분적인 공로에 지나지 않는
 다. 그저 강희와 청나라 조정에 관한 일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다.
   그 외에 위소보는 천지회 등 '반청복명'의 각  파 조직을 위해, 청초의
 '문자옥'의 화를 입은 원귀와  외로운 혼백들을 위해,  특히 자기 자신의
 생명의 안전을 위해 더욱 위험천만인 기이한 공적을 이루었다.
   이것은 잠시 접어두고 일단 위소보의  신분에 대해 살펴 보면 그가  왜
 다른 사람들은 흉내도 못 낼 '기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첫번째 신분은 당연히 양주의 기녀원의 작은 건달로, 기녀원과 도
 박장, 연극판, 만담장, 그리고 시정(市井)에서 활동했다.
   두번째 신분은 청나라 조정의 총아로,  가짜 태감이면서 종오품의 관직
 을 누렸다. 최후에는 관직이  '무원대장군(武遠大將軍)'까지 올랐고, 작위
 는 '녹정공,' 그것도 일등 녹정공(一等鹿鼎公)으로,  '왕'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위치였다.
   세번째 신분은 '반청복명'의 조직인 천지회 총타주 진근남의  제자이자
 청목당 향주였다.
   네번째 신분은 러시아와 붙어 매국 활동을 하던 '신룡교' 교주와 그 부
 인의 기명 (記名) 제자이면서 백룡사였고,  절대 권력의 상징인 오룡령(五
 龍令)을 휘둘렀다.
   다섯번째 신분은 이전 명나라의  공주였던 독비신니의 제자로  '신행백
 변'의 무공을 배웠다.
   여섯번째 신분은 소림사의 기명 제자이면서 오대산(五台山) 청량사(淸凉
 寺)의 주지 방장이었다.
   일곱번째 신분은 서장 상길라마의  결의 형제이면서 몽고 왕자  갈이단
 (葛爾丹)의 결의 형제였다.
   여덟번째 신분은 러시아  섭정왕인 소비아 공주의  애인이면서 군사(軍
 師)로, '원동백작(遠東伯爵)'에 봉해졌다.
   아홉번째 신분은 대만 지방의 최고 행정 장관이었다.
   열번째 신분은 바로 강희  황제의 처남이면서 또 이자성(李自成),  오삼
 계, 진원원(陳園園)의 사위였다.  동시에 또  반청복명의 목왕부(沐王府)의
 여인인 목검병(沐劍屛)의 남편으로 왕옥산(王屋山) 왕증가(王曾家)의  사위
 였다. 부인이 일곱이었는데 신분이 아주 다양했다.
   열한번째 신분은 명말 청초의 한족의 대 유학자인 고염무(顧炎武), 여유
 량(呂留良), 황종희, 사계좌(査繼佐) 등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면서 절친
 한 벗이었다.
   열두번째 신분은 태감 해대부 및 강희 황제들의 '기명 제자'였다.
   이와같이 신분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신분이 너무 복잡하여 사람들의
 상식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위소보는 천지 중에, 강호에서 조정까지, 궁궐
 에서 반역 조직까지, 대륙에서 해외까지,  중국에서 러시아까지, 태감에서
 스님까지, 어디든 가기만 하면 즉시  대성공을 거두지 않는 적이  없었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20세기 초의  '성냥개비(막 발명되었을 때)'처럼 어
 디든 한번 긋기만 하면 불이 붙었다.
   위소보가 이처럼 복잡한 신분을  갖게 되고, 또  이처럼 찬란한 공적을
 쌓게 된 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전문적인 과학으로 연구를 해보아야 할 지
 도 모른다. 몇 마디 말이나 한두  편의 논문, 한두 권의 저술로는  명백히
 밝혀낼 수 없을 것이며, 문제 해결이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간단히 살펴보는 도리 밖에 없다.
   위소보의 작위 중, 두가지 작위가 비교적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통흘
 백'이요, 다른 하나는 '녹정공'이다.
   '통흘백'은 위소보가 '통흘도'에서 제멋대로 노닐 때 강희 황제가 내려
 준 작위로, 위소보는 강희 황제의 뜻을 거역했는데도 죽음을 면했고, 강희
 의 명령에 항거했는데도 관직이 박탈되지 않고 오히려 '대장수들을  초청
 하는 수훈'을 세웠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계속  관직이
 오르기만 했으니 이는 일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강희에게 이 '통흘백'이란 당연히 해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
 으나, 한편으로는 아주 본질을 잘 꿰뚫어 본 명칭이기도 했다.  이 이름은
 왕조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곳에서든지  위소보는 '통흘(전부
 먹어 치움)'로 이득을 얻지 않는 곳이  없었다. 위소보는 마치 최고 점수
 만 내는 도박사처럼,  인생이라는 도박장에서  어디든 가는  곳마다 모두
 '전부 먹어' 치웠다.
   이 점이 위소보가 그 신기한 공적들을 세울 수 있었던 선결 조건 중 하
 나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도박의 매너는 나쁘고, 도박의 기술은 비교적
 좋고, 도박 운은 지극히 좋은 대 도박꾼이었던 것이다.
   소설 중 '도박'에 대해 쓴 장면은 아주 많다. 해대부가 그에게 돈을 주
 어 도박하러 보내는 장면에서부터  그와 다른 대신들이 도박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또 군대 막사에서 도박판을  여는 것에서부터 전쟁터 안에서
 도박판을 여는 것까지, 사람을 죽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도 도박으로 결정
 했었다. 이러한 것들이 아주 다채롭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
 은 '표면적인' 도박에 불과할 뿐이다.
   본서 중에서 위소보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실제로는 항상 '도박'
 의 그림자가 딸려 있었다. '도박'은 그가 즐겨하는 것으로, 바로  그의 품
 성이자 동시에 그가 일을 하는 원칙이기도 했다.
   그는 일곱 명의 부인 중 밤에 누가 그의 시중을 들 것인가도  도박으로
 정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이 <<녹정기>>는 가히 '도박의 경전' 내지는
 '도박왕의 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녹정기>> 중의  일
 등 '녹정공'은 실제로 무슨 '조정의 대들보'니 하는 뜻이 아니며 '천하를
 다투느니(逐鹿中原)' 혹은 '천자의  지위를 노리느니(問鼎中原)'  할 때의
 녹(鹿), 정(鼎)의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남들은 솥(鼎)이 되나 나는  사슴
 (鹿)이 된다'라고 할 때의 '녹(鹿)'과 '정(鼎)'도  아니다. 또한 <사십이장
 경(四十二章經)>의 지도 속에 청나라 인이 보물을 숨겨 놓은 곳인, 중국과
 러시아 국경에 있는 안조략산(安助略山:러시아어),  호마이와집산(呼瑪爾窩
 集山:만주어), 녹정산(鹿鼎山:한어)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도박왕
 통흘공'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하지만 위소보의 '녹정공'은 또한 상술
 한 모든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면에서 진짜라고 할 수 있다. 그 원인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수훈을 건립했으니 '나쁜 도박 매너와 뒤떨어지는 도박  기술과
 좋은 도박 운' 등등 외에도 당연히 다른 재간과 비결이 있다는 사실을 인
 정해야만 한다.
   위소보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과 '남에게 전수하지 않는 비결'을 가지
 고 있었다. 먼저 그의 '몸을 보호하는 네가지 보물'에 대해 살펴 보자. 책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위소보의 무공은 비록 평범했으나 몸에는 네가지 보물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적진에 들어와서도 아주 태연할 수 있었다. 첫번째 보물은 예리한
 비수로, 적의 칼날을 잘라낼 정도로 예리했다. 두번째 보물은 몸을 보호하
 는 보의(寶衣)로, 칼이나 창이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세번째 보물은 재빨
 리 도망가는 기술로, 아무도 쫓아오지  못했다. 네번째 보물은 쌍아(雙兒)
 가 옆에 있으니, 청나라 병사들은 적수가 되질 못했다. 이  네가지 보물을
 가지고 고수와 싸운다면 물론 패배할  수밖에 없겠지만, 청나라 병사들을
 대적하기에는 여유만만이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여러 사람을 상처 입히면
 서 위풍 당당하고, 살기 등등하게 속으로 생각했다.
   '그 옛날의 조자룡(趙子龍)도 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나는 위소보란 말씀이야.'
   #
   
   이것은 그의 무공을 말한 것이다.  그는 무공이 고명하지 못했다.  비록
 수많은 일류 고수들, 예를 들어 해대부, 진근남,  독비신니, 징관 화상, 홍
 안통 교주, 홍부인 소전 등등의 사람들을 스승으로 모셨었으나, 그는 성격
 이 게을러서 열심히 무공을 연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네
 가지 보물'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나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
 었다. 따라서 위소보 같은 대인물에게 있어서  무공이란 그저 일종의 '소
 도(小道)'이자 작은 오락거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사실 위소보가 몸을 보호하고 뛰어난 공훈을 세우게 된 데에는 또 다른
 네가지 보물, 혹은 네가지 '내공' 덕택이었다.
   첫째는 그의 비수보다 더욱 예리한 '아첨과 달변'이요, 둘째는 그의 보
 의보다 더욱 견고하고 튼튼한 '낯두꺼움'이요, 셋째는 그의 '신행백변'보
 다 더욱 정묘하고  단련된 '교활한  줄행랑'이요, 넷째는  위에서 말했던
 '도박'이다.
   이 중 앞의 세가지 내공(혹은 보물)을 살펴 보도록 하자.
   그의 달변은 실제로 그의 비수보다 훨씬 예리했는데 주된 용도는  바로
 아첨하는데 쓰였었으며, 가장 큰 공적은 바로 청나라 궁중 및 '신룡교'에
 서 사용되었고, 독비신니나 진근남 등의  고수 앞에서도 진가를 발휘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것은 독자 여러분들도 잘 아는 바일 것이다.
   그의 낯두꺼움은 이미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그는 항상 '임기응변'의 방법을  썼다. 그에게는 어떠한 원칙이든
 신의든 방침이든 거의 없다시피 했고, 오직 생명의 보호라는 한가지 원칙
 에만 충실했다.
   중국의 서생들과 강호의 호걸들은 모두 '선비는 죽으면 죽었지  치욕에
 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니고 있었다. 목이  잘려 나간다 해도 인격이
 나 자존심 그리고 체면은 잃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아마 기녀원과 궁중 두  곳만이 이런 원칙이 없는 곳일  것이
 다. 위소보는 그 안에서만 생활했으니 어찌 최고를  달리지 않을 수 있었
 겠는가?
   그는 여러 차례 위험에서 벗어났으나, 이길 수  없거나 도망갈 수 없을
 때면 즉시 '투항'했다. 상대방이 누구이든, 어떤 '관점'이든, 어떤 '입장'
 이든, 어떤 '파벌'이든 상관없이  패배를 인정한 후에는  곧바로 또 모든
 입장을 다 고려하여 강희 황제나 홍교주, 독비신니 등등의 경우처럼 그들
 을 스승으로 삼고 입문하거나, 아니면 상길,  갈이단과 결의 형제가 되고,
 색액도(索額圖), 강친왕(康親王), 다륭과 의형제를 맺는  경우처럼 인척 관
 계를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생명이 위급할 때에는 뜻밖에 오삼계의 조카
 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이득을 얻곤 했다.
   인간의 삶 중에서 천(天), 지(地), 군(君),  친(親), 사(師)의 다섯가지보다
 더 대단한 것은 없다. 그 중 하늘과 땅을 속일 수 있었고, 임금을  기만할
 수 있었고, 친척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스승을 모실 수 있었으니, 어찌
 위소보가 하는 일마다 성공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다시 말해서 만일 위소보에게 낯두꺼움과  수치를 모르는 능력(?)이 없
 었더라면, 그래서 하늘과 땅을  속일 수 없고, 임금을  기만할 수 없었고,
 친척 관계를 맺을 수 없었고, 스승을 모실 수  없었다면, -한 스승을 모셨
 다가 후에는 또 사문을 바꾸곤 하는 일은 바로 '스승을 속이고 선조를 모
 독하는' 대죄(大罪)를 범하는 것으로 무림계에서는 아주 멸시하는 짓이었
 음-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세번째 보물은 '백변(百變:수없이 변하는  것)'이다. 이 능력은 아
 주 잘 단련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라, 만일 그에게 '백변'의  재능이 없었
 다면 어찌 태감이 되고, 화상이 되고,  대장군이 되고 자작(子爵), 백작(伯
 爵), 후작(侯爵), 공작(公爵) 등이 될  수 있었겠으며, 또 어떻게 '위향주',
 '위백룡사', '위형제' 등등이 될 수 있었겠는가?. 또 어찌 하는 일마다 성
 공을 거두어 마침내 해외에까지 명성을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
   그는 일찍이 독비신니에게서 '신행백변'이라는 경신술을 배웠었는데 이
 것은 본래 철검문(鐵劍門)의 목상도장(木桑道長)의 유명한 무공으로 '천변
 만겁(千變萬劫)'이라 불리던  것이었다.(자세한  것은 <<벽혈검(碧血劍)>>
 참조)
   위소보의 다른 무공들은 모두 깊이가 얕고 배우는 즉시 잊어버려서  조
 금도 쓸모가 없었고, 배울 때도 성의 없이 대충대충 넘기곤  했었다. 오직
 이 '신행백변'만을 열심히 연습하여 그리 높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의  수
 준까지는 오를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행'이 되기엔 부족하나, '백변'  만큼은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이것은 우연하게도  그의 천성에 딱 부합되었
 다. 따라서 이 '경공술'은 그의 '내공'이 되어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보
 물이 되었고, '천변만겁'의 기예를 찬란히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백변'은 위씨의 비급이었기 때문에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했던 '스승으로 모시는  학문'과 '친척 관계를 맺는  기술'도
 사실 '백변' 중의 한 방법이었다. 또 그 밖에는 '약속하는 기술'이라든가
 '관직을 임명하는 기술'과 같은 것에서부터,  -그가 갈이단 왕자 및 상길
 라마와 결의 형제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황제에게 갈이단  왕자를
 '정개아호(整個兒好)'로 봉하게 하고, 상길라마를 '서장제삼대활불(西藏第
 三代活佛)'로 봉하게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 도박술, 거짓말하는 기술,
 울려고 마음만 먹으면 우는 기술 등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갖추고  있
 었다.
   위소보의 도박하는 능력, 달변의 능력, 낯두꺼울  수 있는 능력, 백변의
 능력, 이 네가지 신공은 모두 당대 무적으로 모두 천하 제일이었다.
   위소보가 불세출의 기이한 공적과 수훈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이
 네가지 보물 덕분이었다. 하지만 네가지 보물이 비록 진기하고 네가지 능
 력이 비록 대단하다고는 하나 그의 다섯번째 능력에는 비할 바가 못되며,
 만약 이 다섯번째 능력이 없었더라면 그의 이 네가지 능력 역시 천하  제
 일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다섯번째 능력은 바로 '화공대법(化功大法)'이다. 위소보의  다른 네
 가지 능력이 비록 대단히 신기하다고 하지만, 이 '화공대법'과 비교해 보
 면 그저 '꼬마 무당이 대무당을 본 격'이며, '여러 지류들이 대해로 합쳐
 지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이 '화공대법'의 첫번째 비결은 바로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化人爲己)' 것이다.  이 '화공대법'은  원래 <<천룡팔부(天龍八部)>>  중
 '소요파(逍遙派)'의 신공인 '북명신공(北冥神功)'으로,  소요파의 반도 성
 숙노괴(星宿老怪) 정춘추(丁春秋)가 이 신공의 껍데기만을  연공하여 강호
 에서 멸시받는 '화공대법'으로 변화시켰는데 이것 역시 '다른 사람의  내
 력을 빨아들여 자기가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위소보에게 전
 해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소보는  이것을 천하 제일의 경지까지  터득한
 것이었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모십팔은 위소보로 하여금 자신을 스승으로 모시
 게 하려고 하지만, 위소보는 하지  않는다. 모십팔의 무예는 다른  사람과
 그가 싸울 때 충분히 자기가 곁눈으로 배울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그
 의 적의 수법까지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는 신공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그저 초보적인 구상만 있을 뿐이
 었다. 하지만 올바른 무림 인사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이런 일을 위소
 보는 뜻밖에 '스승도 없이 혼자 통달'했다.  훗날 적을 친구로 삼고 친척
 으로 삼고 사부로 모시는 것이라든가,  위험을 평안하고 태평하게 복으로
 바꾸는 것 등은 모두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강희가 위소보에게 왕옥산의  반도들을 없애라고 시켰을 때,
 위소보는 자신이 병법에 통달하지 못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른다는 사
 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강희에게 '진군 계획'을 보고하고, 이
 에 아첨할 줄 모르는  조양동(趙良棟)을 찾아내게 된다. 소설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위소보는 기뻐하며 말했다.
   "나에게도 뭐 별다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오.  그저 지난 번 조형을 만
 났을 때 조형의 모습이 당당하고  재주가 있어 보여 인재라고 여긴  것이
 오. 내가 흠차대신(欽差大臣)이라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아첨을 떨었지만
 유독 조형만은 내 체면을 세워 주려고 하지 않았소."
   조양동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장은 거친 무인이라 상관을 추켜 올리는  데 능하지 못합니다. 결코
 일부러 흠차 대신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내가 탓하자는 게 아니오.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를 찾지도 않았을 것
 이오. 나는 무릇 재간이 없는 사람들은 아첨을  떨어서 벼슬이 오르고 재
 물을 긁어모을 수 있기를 바라고, 아첨을 떨  줄 모르는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재간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조양동이 기뻐하며 말했다.
   "위 대인께서 하시는 말씀은 정말 시원시원하기 짝이 없습니다. 소장은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허풍을 치고  아첨을 떠는 것을
 보면 울화가 치민답니다. 그리하여 상관에게  죄를 짓고 동료들과 언쟁을
 별여 벼슬이 오르지 않았는데 이 모두 저의 황소같은 고집 때문이지요."
   위소보가 말했다.
   "그대가 아첨을 떨지 않는 것을 보면 반드시 재간이 있을 것이오."
   조양동은 입을 벌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를 몰랐다. '나를 낳으신
 자는 부모이지만 정말로 나를 아는 사람은 위 대인'이라고 느껴졌다.
   #
   
   과연 위소보는 견식이 뛰어났다. 이 조양동은 확실히 병법 방면에 있어
 서는 뛰어난 인재였다. 이 장에서는 왕옥산으로 진군하는 계책을 하나 하
 나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위소보는 황상 앞에서 또 한번 공을 세운 것
 이다. 또한 오삼계를 평정할 때 위소보는 본래 '통흘도'에 숨어 있었으나
 황제는 계속 그의 관직을 올려 주었으니 그 원인이 무엇이었겠는가? 그가
 <좋은 대장군들을 초청하고 오삼계의 반역을 평정하고 대만을 청의 영토
 로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이것은 위소보가 조양동, 시랑(施琅), 왕진보(王
 進寶) 등의 사람들을 모두 발굴해 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위씨의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수법'은 정말  대단했다! 다른
 예는 더이상 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화공대법'의 두번째  비결은 '희극적인 것'을  '진실하게' 만들고,
 옛 것을 지금 것으로 만들고, 중국 것을 외국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위소보는 문자를 몰랐고, 자기의 이름도 세 자가  전부 쓰여 있어야 대
 충 알아보는 정도였다. 만약 따로 따로 적혀 있으면 별로 자신할 수 없게
 되었고 그저 '소(小)'자 정도만 확실히 알아보는 형편이었다. 그렇기 때문
 에 견식이 낮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위소보가 비천하고 글자도 모르고  무
 예도 모르는 '몰문화(沒文化)'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위
 소보가 비록 뛰어난 경륜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연극에 관한 한 뛰어
 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방도를 찾아내어 이 세상
 에 다시 없이 뛰어난 박식함을 보이며 살아 있는 학문을 사용하고 고금에
 통달하여 '옛 것을 오늘날 쓰고, 중국 것을  서양에 사용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 중 가장 다채로운 예는  그가 러시아 공주 소비아를 도와  죄수의
 신분에서 '섭정 여왕'이 되게 하는 사건일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위소보
 자신이 다시 한번 위기를 넘기고 어려움을 복으로 바꾼 사건이었다.
  
   @
   이 때 날씨는 매우 따뜻했다. 위소보는 준마를 타고 두 대의 카자흐 기
 병의 호위를 받아 시베리아 대초원의 동쪽에서 질풍같이 말을 몰게  되었
 는데 잔잔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으며 말발굽 소리는 귓가에 울려 퍼졌다.
   왼쪽으로는 예쁜 하녀 쌍아가 눈같이 희고 고운 살결과 앵두같은  입술
 을 하고 있었고, 오른 쪽으로는 파란 눈에 노란 수염을 한 나찰국(러시아)
 의 사신이 동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초피와 재물을  잔뜩 실은 수레들이
 뒤를 따르고 있으니 의기양양한 마음이 들어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길은 죽음에서 목숨을 건진 셈인데 조그만 목숨을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나찰 공주를 도와 큰 공을 세웠으니 이 모두 내가 평소  이야기꾼
 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연극을 많이 본 덕택이 아닐 수 없구나.'
   중국은 나라를 세운 지 수천 년이나 되었으며,  황제의 자리를 놓고 반
 란을 일으켜 서로 죽이고 죽는 경험이 풍부하여 온 세계를 통틀어도 견줄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위소보는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약간의 지식밖에 몰랐으나  놀랍게도
 그 알량한 지식으로 외국 땅에서 위세를 떨치고 소비아를 도와 황제의 자
 리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나라를 안정시킨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일은 희한할 것도 없었다. 청나라 개국 공신들은 조잡하기 이를 데 없
 는 사람들이었고 학문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군사를 통솔하여 싸우는 여
 러 가지 모략은 주로 <<삼국연의(三國演義)>>라는 소설에서  얻은 것이었
 다. 과거 청 태종(太宗)이 반간계로  숭정(崇禎) 황제를 속여서 만리 장성
 을 스스로 망가뜨리듯 원숭환(袁崇煥)을 죽이게 만든 것은 바로 <<삼국연
 의>> 가운데 주유(周瑜)가 계책을 써서 조조(曹操)가 자기의  수군 도독의
 목을 베어 죽이게 했던 고사를 응용한 것이다.  실제로 주유가 조조를 속
 여 수군도독을 죽이게 만든 사실은 역사에 없는 일로 소설가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소설가의 말이 후세에 이르러 사실처럼 되고, 그  얘기가 중국 수백 년
 동안 영향을 미쳤으니 세상 일은 소설보다 더욱 이상하다고 하겠다.
   만주인들이 입관한 후 강토를  개척하여 중국의 국토는 명나라  때보다
 세 배나 확장되었고 멀리 한나라와 당나라가 크게 성하게 되었을  때보다
 도 훨씬 큰 편이었다.  그런 여음(餘蔭)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소설,
 희극, 이야기꾼의 공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
  
   위소보가 모십팔을 구한 묘책도 원래 많이  유전되던 <법장환자(法場換
 子)>라는 연극에서 본딴 것이다.  이런 일들은 위소보의  생애 중에 아주
 많았기 때문에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결국 모두가 다 '화공대법'
 을 교묘히 운용한 것들이었다.
   '화공대법'의 세번째 비결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고' 또 그것들을  하
 나로 관통하고 연결시켜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만들어 자신의 모든 능력
 에 수천 수백 배의 위력을 더하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살아 있는 듯 무초
 (無招)가 유초(有招)보다 나은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여, 인간 능력의 진정
 한 '최고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데 있었다.
   위소보의 학문은 고염무 등보다 못하다. 무공은 진근남, 홍안통  등보다
 못하다. 병법은 시랑이나 조양동 등보다 못하다. 똑똑하고 현명한 것은 강
 희 황제보다 못하다. 하지만 최고 경지에 이른  앞서 말한 온갖 능력들을
 발휘하여 온 세상이 놀랄 만한 공전절후의 각종 수훈들을 세웠으니, 그것
 은 각각 제 분야에서 장점을 지닌 앞서 말한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것
 이었다. 위소보와 비교해 보면 이러하다.
   고염무의 뛰어난 경륜이 무슨 쓸모가 있었던가?
   진근남의 탁월한 무공이 무슨 쓸모가 있었던가?
   시랑 등의 병법과 싸움 능력이 무슨 쓸모가 있었던가?
   다륭 등의 굳건한 충성심이 무슨 쓸모가 있었던가?
   홍안통의 절치부심하는 온갖 계략이 무슨 쓸모가 있었던가?
   오삼계의 반란 음모가 무슨 쓸모가 있었던가?
   이렇게 '단답식'으로 말하자면,  이상의 모든 사람은  모두 위소보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위소보는 '화공대법'을 익혔기 때문에  모든 방면에서 '1등'을  차지했
 다. 이것은 아마도 상술한 사람들과 모든 독자들의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결과일 것이다.
   당연히, 위소보라는 이 '기인'이  이처럼 '기이한 일'을  많이 겪고 또
 이처럼 대단하면서도 어려운 '신기한 공로'를 많이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반은 그의 신공이 확실이 천하 제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에서 기인하고, 나
 머지 반은 시대의 운을 잘 타고난 것에 기인한다. 위소보가 무엇이든 '전
 부 먹어 치울 수' 있었고, 또 만나는 재난마다 복이 되고, 심지어 가는 곳
 마다 이득을 얻고 행운이 깃들 수 있었던 것도 신공만 있고 시대적  운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옛 사람들이 말하던 '모사(謀事)는 사람에게  있고 성사(成事)는 하늘에
 있다'라는 말이 바로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위소보의 경우에는 '모
 사(謀事)는 사람에게 있고 성사(成事)는  땅에 있다'라든가 혹은 '모사(謀
 事)는 사람에게 있고 성사(成事)도 사람에게 있다'라고 해야 맞겠지만  말
 이다. 여기에서의 '땅'은 중국 대륙을 가리키는 것이요, '사람' 역시 중국
 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위소보가 신공을 얻고 그것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지리(地利)'와 '인
 화(人和)' 두가지의 도움에 기인한다. '외국 땅에서 위엄을  드러낼 수 있
 었던 것' 역시 그저  우연한 일이었을 뿐이다. '통흘'  역시 중국의 판도
 내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뿐이었다.
   위소보가 어쩧게 중국 내에서 이처럼 위험을 만나도 복으로 바꿀 수 있
 었는지 그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그가 상대한 사람이 중국인이었기
 떄문이었다.
   그는 한족이든 만주족이든 회족이든 장족이든 몽고족이든 개의하지  않
 았다. 자잘하게 보면 비록 문자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긴 하지만,  크게 보
 면 문(文)과 종(種)이 같았으니, 문(文)은  문화를 말하는 것이오, 종(種)은
 종족을 말하는 것이다.
   위소보는 바로 각 민족의 유전 인자를 받고(한족이 위주가 되기는 했지
 만), 또 중국 문화의 '진정한 정신'을 깊이 체득한 중국 민족 문화의 '정
 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그는 무엇을  하든 이득을 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궁중 내에서 아첨을 떨고 윗사람을  속였던 것처럼, '신룡교'에서도 똑
 같이 행동하여, 지나치면 지나쳤지 모자라지는 않았다.
   양주의 길거리에서 거짓으로 속이는 도박 기술로 이리저리 해 먹었었는
 데, 천하(중국의 천하) 역시 마찬가지로 해 먹었다.
   그는 진근남을 스승으로 모시고,  홍안통과 소전, 독비신니, 강희  황제,
 징관 대사 등등을 스승으로 모셨다. 다만 이  '스승'들이 서로를 이해 못
 했을 뿐이었다.
   그는 도궁아(陶宮娥)를 친척으로 삼고, 상길과 갈이단, 색액도 등등과도
 결의 형제를 맺어 친척 관계를 만들었다.
   그는 건녕 공주를  부인으로 삼고(먼저 실행하고  후에 보고하여, 기정
 사실로 만들고 말았지만), 또 소전과  아가(阿珂) 등등도 부인으로 삼았으
 며, 그 일곱 명의 부인들 중에서 적어도 쌍아  한 사람은 완전히 그녀 자
 신이 원해서 그와 결혼하기도 했다.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대만에서 대리로 지방관을  맡았
 을 때의 광경일 것이다. 소설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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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대만의 백성들은 동태비(董太妃)에 대해 처절한 한을 품고 있었지
 만 진영화(陳永華)가 둔전법을 교육하고  실리를 추구하고 병폐를 없애고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를 '대만의 제갈량(諸葛亮)'이라고
 불렀다.
   정극상이 나라를 맡고 있었을 때에는 누구도 감히 동태비에 대해서  한
 마디도 나쁜 말을 할 수  없었고, 진영화에 대해 한마디도  좋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위소보가 '동씨의  초상화를 없애고 진씨의 것을
 만들라'는 명령을 하달하자 사람들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게다가 위소
 보가 국성야(國姓爺)의 신상  앞에서 절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백성들은 더더욱  감격했다. 비록 이  위대인이란 인물은 돈을
 지나치게 요구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진근남  군사의 제자라, 대만의 군민
 들에게 호의를 느낀다고 생각했다.
   시랑이 청나라 병사를 이끌고 대만을 평정하는 바람에 명나라의 해외에
 남아 있는 터전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므로 시청위탐(施淸韋貪:시랑은
 청렴하고 위소보는 탐욕스럽다는 뜻)이라는 말이 생겨났지만 백성들은 그
 래도 이 위대인이라는 분이 대만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랬고 될 수  있으
 면 시랑은 영원히 돌아 오지 않았으면 했다.
   #
  
   또한 위소보가 강희의 명령을  받들고 대만을 떠날  때, 소설에서는 또
 이렇게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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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의 백성들은 내지로 거처를  옮기라는 조정의 뜻을 철폐시킨  데는
 이 소년 위대인의 공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으
 로 만민산(萬民傘), 호민기(護民旗) 등의 선물을 수 없이  보내 왔다. 심지
 어 위소보가 배에 오를 때는 신발을 벗어 높이 들어 올리면서 작별  인사
 를 했다. 이 탈화(脫靴)의 인사법은 본시 청렴  결백하고 백성들에게 존경
 받는 지방관에게만 사용했었다. 그런데 위소보  같은 탐관오리가 이런 영
 광을 누릴 수 있었으니 실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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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속에서는 위소보가 이처럼 '탐관오리'인데도 뜻밖에 대만  백성들
 에게 이같은 사랑을 받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위소보는 그저 '몇마디 말'(<동씨의 초상화를 없애고 진씨의 것을 만들
 라> 혹은 <대만에 그대로 있을 수 있도록 건의하겠다>는 등의 말)밖에 하
 지 않았고,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리고, '몇 번 고개 숙여 절을 했을'  뿐
 이었다!(진영화를 사부로 모실 때도 그저 절만 몇 번 해서 '형식'만 갖췄
 을 뿐, 인품이나 무공은 어느 것 하나 배우지를 못했으니 '실상(實)'은 없
 고 '명목(名)'만 있었다고 할 수 있음) 말, 눈물, 절 등으로 수작부리는 것
 은 본래 위소보가 아주 그럴 듯하게 잘하는 일이었다.
   그의 '화공대법'은 물론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
 각해 보면 대만이 비록 해외의 외딴 섬이긴 했으나 대만 사람들 역시  중
 국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위소보의 '신공'은 바로 '무
 심코 버드나무를 꽃았더니 버드나무에서 싹이  돋는' 격이라고 할 수  있
 다.
   위소보는 궁중에서 뿐만 아니라 길거리, 강호,  반군, 비밀 조직 속에서
 모두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으며, 또한 지방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까지 영
 웅처럼 숭상되었으므로 그를 공전 절후의 천하 제일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중국에서는 그러했으며, 또한 오로
 지 중국에서만 그럴 수 있었다.
  
   五. '잡종'과 '순종'
  
   확실히 위소보는 명명백백하게  '창녀가 낳아 기른  자식'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바로 청대 강희 년간 양주에 있던 여춘원(기녀원)의 창녀였으며
 이름을 위춘방이라 했다.
   위소보는 명명백백하게 '잡종'이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다. '혈통론'을 중시하는 중화 민족에게는 더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녹정기>>라는 이 소설의 결미 부분에서 작자도 어쩔  수 없이 이 점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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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소보는 부인과 아들 딸들을 데리고 양주에 내려간 날, 여춘원에 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모자는 서로 기뻐하며 상봉했다. 위춘방은 일곱 명의 며
 느리들이 하나같이 꽃처럼 예쁜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소보라는 이 좀도둑이 계집들을 알아 보는 눈은 있단 말이야. 이 녀석
 이 기녀원을 열면 반드시 큰 재물을 모을 수 있겠어.'
   위소보는 어머니를 방 안으로 밀어들이면서 다짜고짜 물었다.
   "어머니, 나의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지요?"
   위춘방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아니?"
   위소보는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머니가 뱃속에 나를 잉태하기 전에 어떤 손님들을 받았나요?"
   위춘방이 말했다.
   "그때 너의 어머니는 아주 예뻤기 때문에 매일 여러 손님들이 찾아들곤
 했는데 내가 어찌 그들 모두를 기억할 수 있겠느냐?"
   위소보가 말했다.
   "그 손님들은 모두 한인들이었나요?"
   위춘방은 말했다.
   "물론 한나라 사람도 있었고,  만주의 벼슬아치도 있었으며, 또  몽고의
 무관도 있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외국의 귀신 같은 작자는 없었나요?"
   위춘방은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너의 에미가 썩어 문드러진 갈보인 줄 아느냐?  외국 귀신들마저
 받게? 빌어먹을! 나찰귀(러시아인), 홍모귀(서양인)들이 여춘원으로 들어올
 때마다 이 에미는 빗자루로 그들을 쓸어 냈단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안심을 하며 말했다.
   "그것 참 잘하셨습니다."
   위춘방은 고개를 쳐들고 옛 일을 회상해 보다가 말했다.
   "회족 사람이 있어서 종종 나를 찾아왔는데 그의 얼굴 모습이  매우 준
 수했었다. 나는 종종 너를 볼  때마다 너의 잘 생긴  코가 그를 닮았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지."
   위소보가 말했다.
   "그러면 한인, 만주인, 몽고인, 거기에다가 회족 사람까지 있었군요? 그
 럼 서장 사람은 없었나요?"
   위춘방은 크게 의기양양해져서 말했다.
   "어째서 없었겠느냐? 그 서장의 라마는 침대 위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불경을 외웠지. 불경을 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눈동자를 슬금슬금 굴려
 서 나를 쳐다보았다. 너의 눈동자가 흘금거리는 것을 볼 때면 꼭 그 라마
 를 보는 것 같다니까!" (全書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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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 선생이 백 사오십만 자에  이르는 거대한 장편 저작의 끝에  이런
 장면을 써 넣은 까닭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위소보는 '창녀가 낳아 기른 자식'이요, '잡종'이다. 이것은 본서의 제2
 회에 이미 명백히 쓰여져 있다. 그러니 소설의 최후에 이런 장면을 써 넣
 는 것은 사족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단락의 설명은 대단히
 필요한 부분이요, 대가들이 이 소설을 읽을 때엔  더더욱 마지막에 이 점
 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단락을 설명하는 것은 적어도 두가지 명백한  의의를 지니며, 이 두
 가지는 또한 바로 이 <<녹정기>>의 관건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선, 이 소설은 아주 쉽게 사람들에게 이  소설의 주제가 작가의 처녀
 작인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과  동일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서검은구록>>의 주제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강호 호한들이 각 민족과 연
 계하여 청나라에 반항하는 비극을 그린 것이다. 비록 소설의 최후를 비극
 으로 끝맺고 있기는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진가락(陳家洛)과 그의 지도
 하의 '홍화회(紅花會)' 군웅들의 빛나는 활약은 그들의 비장한 형상과 함
 께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녹정기>>는 김용의 최후의 소설로, 작자가 다시 '반청복명'이라는 오
 래 된 길로 되돌아 간 것처럼 보인다. '사조' 삼부작과 <<천룡팔부>>  등
 등의 김용 중기작 이후의  소설에서는 모두 송(宋), 금(金),  원(元), 명(明)
 시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오직 처녀작과 마지막 작품에서만
 청에 항거하는 내용을 주제로 삼고 있다.
   당연히 똑똑한 독자라면 이 <<녹정기>>가  청에 항거하는 '민족주의적
 인 영웅의 역사시'의 '옛길'로 되돌아 갔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와  다른 점이 분명하게  있으며, 심지어는 분명히
 그 길을 초월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더욱 높은 수준에서 이 옛 주제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위소보라는 형상과 의의를 진가락이라는 형상과 의의와 비
 교해보면 아주 차이가 난다는 점으로  증명된다. 위소보와 진가락은 성질
 상 차이를 보인다.
   보기에 <<녹정기>>라는 소설의 내용과  주제는 여전히 청의 통치자(강
 희로 대표되는)와 '반청복명'의 한족 군웅들(천지회 진근남과,  목왕부 등
 으로 대표되는)이라는 두가지  정치 세력의 민족  투쟁에 관련되어 있고,
 위소보라는 이 인물은 이 두가지 세력 속에 끼어 있는 특수하고 기형적이
 며 비극적인 형상이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위소보는  진정한 '반청' 혹은  '반청복명'의 영웅
 호한이라고 할 수 없다. 그가 천지회에 들어간 것은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정말로 어떤 진정한 의의를 지니는 일을 행한 적도
 없고, 그의 '위향주'라는 신분과는 크게 어긋나는 행동을 보였다.
   하지만 위소보는 진정으로 확실한 '매국노'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강희 황제를 위해서 굳은 충성을  바치며 목숨을 바쳐서 일을 했기  때문
 에, 그 결과 위풍당당하게 진급되고 재물을 벌 수 있었다. 그는 대 매국노
 인 오삼계에 대해 당시의 일반적인 한족처럼 어떠한 호감도 없었고, 원한
 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기 때문에 어떠한 악감정 또한 없었다.
   그는 또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이용해 천지회의 진근남 이하  사십여명
 의 영웅들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었고, 고염무 등 세 명의 대 유학자의 생
 명을 구하기도 했으며, 오지영(吳之榮:명백한 매국노)을 죽였고, 오응웅(오
 삼계의 아들)을 붙잡았으며, 최후에는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모십팔(초야
 인사로 명나라 민족의 대의를 잃지  않던 호한이며, 위소보의 은인)을 구
 해내기까지 했다.
   이러한 것들을 보아도 위소보는 결코  매국노가 아니었다. 또한 주목해
 야 할 것은 강희  황제가 그에게 천지회를 없애라고  했으나, 그는 '통흘
 도'에서 그의 성격과 전혀 맞지 않는 무료한 수년간의 오랜  시간을 보낼
 지언정 그의 명령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강희 황제조차 결국에는
 그에게 양보를 하여 도리어 그의  친구들에게 일종의 '미덕'을 발휘했다.
 또 다른 증거로는 그가 강희가  천지회에 심어 놓은 첩자 풍제중을  죽인
 것이다. 이 밖에 강희가 '성지'를 내려 그더러 진근남과 풍제중(風際中)을
 죽이라고 한 것은 명백히 이간책을 써서 위소보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만
 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소보가 '반청복명'에  뛰어 들지도 않고,  천지회를 없애지도
 않은 것은 '정치'나 '민족적 대의' 방면에서 고찰할 문제가 아니다.
   그는 무슨 정치라든가 민족적 대의 같은 것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
 하고 있었고, 또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모두 그의
 '도덕적 양심'의 결과였다.
   위소보에게 '도덕적 양심'이 있다는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일이
 다. 즉, '임금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친구에게는 의리를 다한다'는  것이었
 다. 다시 말해 황제인 '소현자'는 '소계자'인 그의 좋은 친구였고, 천지회
 의 군웅 역시 그의 좋은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친구에게 의리를  다한다는
 이 덕성을 관철한 것 뿐이었다. 또한 진근남은 그의 사부였고,  강희 역시
 그의 '사부'였기 때문에 그는 '대의를 위해 스승을  버릴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스승을 속이고 선조를 모독하는' 대죄(위소보는  아마 무엇이 스
 승을 속이고 선조를 모독하는 것인지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적
 어도 그것이 '자라같은 바보 녀석이나 할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음)
 를 범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희가 그의 사부인 진근남을
 죽이려고 했을 때 그는 목숨을  걸고 구해냈다. 또 독비신니가 강희(그의
 사부이자 친구이자 임금)를 죽이려고 했을 때, 그는 역시 목숨을 버릴 각
 오로 그를 구해냈다.
   강희가 천지회에 불리한 일을 꾸미면 그는 몰래 알려 주었고, 천지회와
 다른 사람들이 강희에게 불리한 일을  꾸미면 그는 또한 몰래 알려  주었
 다. 그는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확실히 '두 방면에  전부 비위 맞추는'  사람이었다. 만약 정말로
 두 방면을 모두 비위 맞추지 못하게 되면, 한  쪽이 그에게 다른 한 쪽을
 괴롭히라고 요구하게 되어 결국 그는 '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
 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최후에 뜻밖에도 양 쪽이 모두 그를  괴롭히게 된다. 강희 황제
 는 그에게 더이상 '두 마리 토끼를 잡지 말라'고 요구하면서 그에게 확실
 한 선택을 하라고 강요한다. 실제로 강희는 줄곳  그에게 압력을 가해 왔
 었다. 또한 천지회의 군웅들도 그에게 강희를 죽여 천지회의 총타주인 진
 근남의 복수를 하라고 요구한다. 청목당의  형제들은 그를 천지회의 총타
 주로 세워 '반청복명'의 총사령관으로  추대하려고까지 한다. 또한,  더욱
 심각하게도 고염무등의 대 유학자는  아예 그더러 황제를 하라고까지  한
 다!
   이러한 여러가지 압력 속에서 위소보는 정말로 한가지 선택을 할  수밖
 에 없게 된다. 그것은 바로 '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소보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을 실제로 '정치적 입장'과 '민족의 중대사'라는 가치와 관련하여 판단
 내리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그저 위소보라는 이 특수하고 구체적인 개인에
 관련된 판단일 뿐이다.
   천지회의 군웅들은 모두 '민족적 중대사'와 '민족적 대의'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위소보를 '한나라 사람'으로 오해하는  커다
 란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
   강희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위소보가 대체  한족(漢族)인가 아닌
 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모든 독자들 역시 대부분은 거의 위소
 보를 '분명한 한족'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다는 보장은 없
 다. 실제로 위소보는 '어머니만 알  뿐'이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마도 한나라  사람이었을 테지만 그의 아버지는
 한족일 수도 있었고, 만족일 수도 있었고, 회족, 장족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위소보는 '잡종'이었다. 그는  아마도 한족,
 만족, 몽고족, 회족, 장족 중 하나일 것이다. 만약 그의 아버지가 한족이었
 다면, 그는 아마도 '매국노'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의 아버지가 만주족이었다면? 혹은 한족도 만주족도 아닌 회족(그
 의 코가 닮았었다는)이었다면? 혹은 장족(그의 눈이 닮았었다던)이었다면?
   이것이 바로 <<녹정기>>의 묘한 점이다. 독자는 '민족적 대의'나 '반청
 복명'과 같은 이러한 좁은 '민족주의적 주제'의 각도에서 이 소설을 이해
 해서는 안 된다. 또한 간단하게  '민족주의'라는 이러한 각도에서 위소보
 라는 이 주인공을 이해해서도 안 된다. 설사 위소보가 한족의 자손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강희와 청나라 조정에 맞서지  않는 것(위소보에게 청나라
 조정은 완전히 허무한 것이었으나 강희는 분명  존재하는 사람)은 한편으
 로는 그의 성격 중에 '타락적'인 요소가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긴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화를 복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강희라는 현명한 군주의 통치는  최소한 명나라 조정의 한인들의  어느
 황제의 통치보다도 더 뛰어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이것 역시 소설이 우
 리들에게 제공해는 기본적인 사실이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이해하려면 좁은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의 각도에
 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위소보 본인이 '민족이 분명하지 않고 신
 분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행한 일들은 그저 그 자신과 관계가  있을 뿐, 그의 민족이나 '혈
 통'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던 것이다.
   한편, 소설에서 묘사한 위소보와 위춘방 모자의 대화는 실제로 아주 중
 요한 정보를 준다. 모두들 이 정보와 그  중요성을 무심코 념겨버렸을 테
 지만 말이다.
   그것은 바로 위소보는 한편으로는 중국  각 민족의 '잡종'이지만, 또다
 른 한편으로는 명백하게 '순수한 중국인'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중화 민족'이라는 이 신분은  순수하면서도 순수한 것이다. 소설
 에서 위소보가 어머니에게 외국 귀신을 접대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 묻자,
 위춘방은 대노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너의 에미가  썩어 문드러진 갈
 보인 줄 아느냐? 외국 귀신들마저  받게? 빌어먹을! 나찰귀(러시아인), 홍
 모귀(서양인)들이 여춘원으로 들어올 때마다  이 에미는 빗자루로 그들을
 쓸어 냈단다.> 이것은 위소보가  '중화 민족'의 순수한  자손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한족인지 만주족인지 회족인지 몽고족인지 아니면 장족인지
 하는 점에 대해 시간을  낭비하며 고증할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그것은
 고증하고자 해도 확실히 알아낼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위소보는 중화 민족의 살아 있는 세포이다. 중화 민족의 '민족성'의 상
 징인 동시에 중화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결정체인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
 한 각도와 이러한 고도, 심도에서 위소보와 <<녹정기>>를 이해해야만  한
 다.
   위소보의 성격이 발하는 광채는 당연히 중국 각 민족이 대 단결하고 대
 융합한 공동의 광채이다. 위소보의  성격 중의 병폐와  타락 역시 사양할
 여지 없이 각 민족이 모두 지니고 있을  부분들이다. 당연히 중화 민족이
 라는 가정 하에서 그의 어머니가  한나라 사람이었으므로, 위소보는 한족
 에 속할 가능성이 가장 많기는  하다. 최소한 그의 혈통  속에 50 퍼센트
 정도는 한나라 사람의 피와 유전 인자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의 아버지가 한족일 가능성은 최소한 다섯 민족 중 하나이므로  이십
 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  따라서 만약 위소보를  '타락한 중국인'이라고
 말한다면, 70 퍼센트 정도는 그를 '타락한 한족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
 을 것이다.
   위춘방이 외국 귀신(외국인)을  손님으로 받지 않은  것은 당연히 그가
 기녀의 절개를 지켰다는 점에서 표창할 만하다.
   위춘방이 외국 귀신을 접대하지 않았다는 이 사실은 당시 위소보로  말
 하자면 그의 마음을 대단히 흐뭇하게 하는  좋은 일이었다. 적어도 800년
 뒤의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를 내리든 그것 별로  상관할 바가 아니다. 더
 군다나 위소보는 줄곧 눈 앞에 있는 사람만을 생각하고 이후의 일은 생각
 하지 않는 사람으로, 머리를  감출 수 있으면  꽁무니가 드러나든 어떻든
 상관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만약 오늘날 태어났다면 위소보는 어머니인 위춘방이 외국 귀신을 접대
 하기를 희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말해봐
 야 허망한 것들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六. 결론
  
   위소보와 <<녹정기>>에 대해서 당연히 더  자세히 언급할 내용들이 많
 다. 위소보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위소보'이고, 김용은 '말로 다  표
 현할 수 없는 김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면의 한계상 우리는 그저
 이것만 얘기하고 마치는 도리 밖에 없겠다. 끝으로 녹정기의 해설을 끝낸
 감회를 한 수의 시를 소개하면서 풀어 보고자 한다.
  
   @
   탁주 한 병 들고 서로 만남을 기뻐하니
   고금의 수많은 일들을
   웃음 섞인 얘기 속에 다 풀어 놓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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