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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평론 0) - 서론 序論 - 진묵 [펌글]

kcyland 2016.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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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序論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그'란 무협소설의 대종사(大宗師) 김용(金庸)을  가리키는 것이
 다. 얼핏 들으면 어느 정도 과장된  말 같지만, 사실은 그 말로도  모자란
 감이 있다.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당연히 김용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
 이 있으니, 아시아, 서구, 남지나해, 북미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러하다. 마
 치 송대(宋代)에, 우물이 있는 곳이면(사람이 있는 곳이면) 유영(柳永:宋代
 의 시인)의 사(詞)를 읊는 사람이 있었다던 것처럼 말이다.
   중국인이 있는 곳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 중국인이 없는 곳에서
 도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김용을 알고 있고, 게다가 김용에 대해 즐겨 이
 야기한다. 20년 전의 남월(南越) 국회에서는 뜻밖에도 김용의 소설에 나오
 는 인물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
   김용이 창조한 인물들의 전형(典型)이 워낙 독특하기에,  누구는 악불군
 (岳不群:위선자)라느니, 누구는 좌랭선(左冷禪:패권주의자)이라느니 하면서
 서로 질책을 가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 대륙은 원래 중국인들의 근원지이므로 김용의 이름을 많은 사람들
 이 알고 있고, 김용의 작품은 대륙의 동서남북을 온통 휩쓸고  있으며, 남
 녀노소, 고아통속(高雅通俗)을 불문하고 '김용 애호가'들이 많은데  이 모
 든 현상은 전혀 이상할 바가 없는 일이다. 만일 이상하다고 말해야 할 것
 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김용의 작품을 한번  읽어 보지도 않고 김용의
 책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게 있
 다는 사실이며, 어떤 사람들은 김용의 작품을 보기는 보면서도, 심지어 세
 번, 네번, 다섯번, 여섯번까지 보고서도, 여전히 가타부타 말이 없어  답답
 하다는 점이다.
   대륙의 문학 평론계와 문화 연구계가 김용의 작품이 대륙을 휩쓸고  있
 는, 이 분명하면서도 연구 가치가 있는 문학  현상과 문화 현상에 대해서
 여전히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며  신중히 침묵을 지키고 있어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마침내 많은 '김용 애호가'들이 이 기괴한 침묵을 깨뜨리기
 시작했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느니  하는 평가의 한  곁에서 김용에 대해
 논평하고 김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간행물에 어쩌다가 발표되는 김용에 관한 글이 예전과 마찬가지
 로 양도 적을 뿐 아니라 '김용의 작품을 즐겨 읽는 사람들'과 '김용열(金
 庸熱)'에 부응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했지만,  그것들이 점차 불어나
 이제는 집에서나 공공장소에서, 차를 마시거나 식사 후의 휴식 시간에, 일
 을 시작하기 전의 아침 시간에, 심지어는 한  밤중에 잠을 자지 않으면서
 까지 김용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아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지경에  이르
 렀다. 이것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현상이 되었다.
   필자 자신으로 말하자면, 우선은 '김용 애호가'요, 둘째로는 김용  소설
 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고, 논할 만한 가치가 있고, 전문적으로 연구할 만
 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김용의 작품을 연구하는 '김학(金學)'이  현시대의 '홍학(紅學:紅樓夢을
 연구하는 학문)'과 마찬가지로 통속적인 것에서 고급화되고, 개인적인 일
 에서 공적인 일이 되고, 적은 양에서 많은 양이 되고, 얕은 연구에서 깊이
 있는 연구가 되어, 일반적인 문학 연구나 문화  연구에서 연구하게 될 과
 제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필자는 '김용 애호가'요,  '김학(金學)'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
 에 대륙에 '김학(金學)'의 길이 열리기를 원하며, 글을  쓰고 책을 펴내어
 김용의 소설과 '김학(金學)'의 명분이 제자리를 분명히 잡기를 바라며, 아
 울러 이로써 수많은 김용 애호가들과 함께 서로 절차탁마하는 계기가  되
 기를 바라는 것이다.
  
   一
  
   필자는 일찍이 <<문예보(文藝報)>>에 <俗極而雅,奇而致眞-金梁古武俠小
 說漫評(아주 통속적이면서도 고아하고, 기이하면서도 진실하다-김용(金庸)
 과 양우생(梁羽生)과 고룡(古龍)의  무협 소설 만평)>이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었고, 그 후에도 1989년 제6집으로 발간된 <<백화주(百花洲)>> 잡
 지에 4만여 자의 장편 논문을 발표한 바가 있다.
   이 몇 편의 글을 쓰는 동안에 나는 '고아함과 속됨(雅俗)'은 한낱 명사
 에 지나지 않으며, '명가명, 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름을 이름 붙일 수 있
 는 것은 영원한 진리로써의 이름이 아님)'이  옳다는 신념을 굳게 견지하
 고 있었다. 한편 문학에도 '도(道)'가 있기 마련인데 이 또한 '도가도, 비
 상도(道可道,非常道:도를 도라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진리로써의 도가
 아님)'라는 믿음을 견지했다.
   '아주 통속적이면서도 고아하다(俗極而雅)'라는  말은 내가  김용 등의
 무협 소설을 보는 하나의 관점인  동시에 중국 고대 문학의 발전과  역사
 및 그 규율을 보는 하나의 관점이기도 하다.
   나는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 문학이 수천 년이라는 기니긴 세월을
 거치면서 그 어느 하나도  '속됨(俗)'에서 '고아함(雅)'으로, 민간에서 조
 정(朝廷)으로, '길거리의 떠도는 이야기' 내지 '심심풀이로  읽는 책'에서
 '대아지당(大雅之堂:고상한 자리)'으로의 형식적 변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시경(詩經)>>의  <채풍(采風)>은  본래 '민간'에서   수집해낸
 '예술'이었다가 마침내 '경전'이 된 책이다.
   그 후에 사(詞), 곡(曲), 화본(話本), 전기(傳奇) 등등의 문학 예술 형식은
 전부 '미천한 출신'인 민간에서 비롯되었으니, 저 '서로 화합하여 지저귀
 는 물새가 섬에서 노네. 아리따운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배필이로세(關
 關雎鳩,在河之洲.窈窕淑女,君子好逑)'라는 노래에서부터 '중국  고전 소설
 의 최고작'이라는 <<홍루몽(紅樓夢)>>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모두 다
 현재에는 당연히 으리으리한 대아당(大雅堂)에 모셔져 있지만,  그 당시에
 는 마을의 이장 노릇을 하던 보잘것 없던 시절의 유방(劉邦)의 신세와 비
 슷했을 따름이었다.
   소설과 유사한 이러한 형식은 원래 '길거리의 떠도는 이야기'요, '군자
 는 하지 않는 것'이요, '마차나 끌고 죽이나 파는 자들'의 속문학(俗文學)
 이었다가, 근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면서 양계초(梁啓初)가 '새로
 운 나라의 국민이 되고자 하면  반드시 새로운 나라의 소설이 있어야  한
 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부터 일약 유명해지게 되었다.
   이런 원인으로 인해 중국의 근대 소설, 특히  신민패(新民牌) 소설이 유
 행하게 되었다. 지금은 대단히 숭상하고 있는 <<서유기(西遊記)>>, <<홍루
 몽(紅樓夢)>>, <<삼국연의(三國演義)>>, <<고금기관(古今奇觀)>>, <<유림외
 사(儒林外史)>>, <<요제지이(聊齊志異)>> 같은 책들도 옛날에는  전부 '심
 심풀이 책'이었으나 지금은 '대아(大雅)'가 아닌 것이 없다.
   문학형식에 있어 통속에서 고아한 문학 경전으로 바뀐 원류와 원인  및
 결과에 대해 얼마나 많은 문인과 선비들이 머리를 짜내어 고증하고  탐색
 하고 연구해 왔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무협 소설과 같은 이러한 형식은,  중국에서 그 원류가 아주
 오래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원류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김용같은
 인물이 생겨날 수 있었고, '김용열(金庸熱)'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심
 지어 그것의 효시(嚆矢)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중의 <유협열
 전(游俠列傳)>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물론,  사마천의 <유협열
 전>은 '역사'이지 '예술'이 아니며, '엄숙문학(嚴肅文學)'이지  '통속문학
 (通俗文學)'이 아니므로 사마천을 무협 소설가의  '비조'로 삼는 것은 말
 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록 이 학설이 독자들
 과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 정설로 확립된 것은 아니지만 널리 퍼져 있는
 견해인 것만은 사실이다.
   설사 <유협열전>을 무협 소설의  효시로 삼을 수 없다  하더라도, 당대
 (唐代) 전기(傳奇) 중의 상당히 많은 편(篇)은 의심할 여지 없이 현재의 무
 협 소설의 선구로  삼을 수 있으니,  그 중  유명한 작품으로는 <홍선(紅
 線)>, <섭은랑(攝隱娘)>, <곤륜노(昆侖奴)> 등이 있다.
   명대(明代)에 이르러 '설화(說話)'가 유행하면서 무협  이야기를 얘기하
 는 '화본(話本)' 역시 그에 따라  생겨나게 되었다. <이배공궁도봉협객(李
 湃公窮途逢俠客)>, <양겸지객방우협승(楊謙之客舫遇俠僧)> 등등은 비록 그
 무협의 형상화에 있어 <홍선(紅線)> 중의 홍선(紅線)보다 훨씬 성공적이라
 고는 할 수 없지만, 소설의 구성이  훨씬 곡절 있고, 내용이 훨씬  풍부하
 다.
   청대(淸代) 말엽, 장편 협의소설이 대거  출현하였다. 최초의 작품이 문
 강(文康)의 <<아녀영웅전(兒女英雄傳)>>이요,  두번째는  석옥곤(石玉昆)이
 평화(平話)의 저본(底本)을 근거로 정리한 <<삼협오의(三俠五義)>>이며, 그
 다음으로는 <<칠검십삼협(七劍十三俠)>>, <<영웅대팔의(英雄大八義)>> 등
 이 있었다. 이런 소설들은 협객들이  지방을 떠돌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폭정에 대항하며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는 것을 묘사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 그 후 <<시공안(施公案)>>, <<팽공안(彭公案)>>, <<유공안(劉公
 案)>> 등의 '공안소설(公案小說)'이 계속 출현했다. 이런  것들은 무협 소
 설의 하나의 변종(變種)으로 볼 수 있는데, 당시  민간에서 자못 광범위하
 게 유포되었다.
   민국 이후, 특히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무협 소설은 더더욱 흥성
 하였다. <<강호기협전(江湖奇俠傳)>>,  <<촉산검협전(蜀山劍俠傳)>>, <<청
 성십구협(靑城十九俠)>>, <<대도왕오(大刀王五)>>, <<초망영웅전(草莽英雄
 傳)>>, <<철기은병(鐵騎銀甁)>>, <<칠살비(七殺碑)>> 등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무협 소설은 기나긴 발전 과정을 거쳐 중국 문학의 하나의  독특하면서
 도 상대적으로 완전한 문학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은 결코 '겉모양을  강조하
 여 사람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고아함(雅)'과 '속됨(俗)'
 이라는 이 관념들이 단지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설
 명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간단한 규정인  이 '고아함'과 '속됨'이라는 명
 목으로 어떤 문학 작품이나 혹은 문학의 전체 형식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오만과 편견'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홍루몽(紅樓夢)>> 및 '홍학(紅學)'의  경우는 우리들이  거울로 삼아
 연구할만한 가치가 많다. 또 <<수호전(水滸傳)>>은  오늘날 놀랍게도 '중
 국의 4대 고전 소설 명작'의 하나이지만, 그 책을 무협 소설이라 한다 해
 도 반대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책은 본래 무협 소설이었으니
 까 말이다.
   '오만과 편견'은 매우 나쁜  습관이다. 그리고 우리  중국 민족은 그저
 '묘당(廟堂)의 높음'만 인정할 뿐 '강호(江湖)의 끝없음'은 인정하지를 않
 는다. 비록 현재에는 무슨 '묘당'이니 '강호'니 하는 차이가 이미 없어졌
 고, 또 누가 '정종(正宗)'이니, 누가 '방계(旁系)'니 하는  얘기를 하는 사
 람도 이젠 없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중국인들의 '정통(正統)'에 대한 신념
 은 여전히 조금도 변화가 없다. '속된 것(俗)'이기만 하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주 통속적이면서도 고아하다'는 말을 하면 무
 슨 '나라 밖에서 벌어지는 괴상한  이야기'쯤으로 듣는다. 이것은 아마도
 전통 교육이 빚어낸 결과일 것이다.
   다행히 이러한 상황은 이미  점점 변화하는 와중에  있다. 또한 확실히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二
  
   '고아함과 속됨에 관한 관념(雅俗之念)'을 바꾸거나  없애는 것은, 무협
 소설이나 속문학이 아문학(雅文學) 혹은 순문학(純文學)이나  엄숙문학 등
 과 차이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며, 속문학이  진정 좋은 문학이고
 아문학은 '얘기할 가치도 없는 것'이라는 주장은 더더욱 아니다.
   현재는 확실히 많은 '하층 독자들'이 '순문학' 작품을 읽지 않게  되었
 다. 이것은 위에서 상술한 고루하고 진부한 정통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
 달은 때문이며, 동시에 사람들이 우려하는 중국 민족 문화의 본질에 관한
 문제 탓이다.
   '명가명, 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는 대가의 숙련된 말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말하자면 '현상을 투과하여 본질을 보아야'하는 것이다.
   최소한, '무협소설열(武俠小說熱)'과 '김용열(金庸熱)'  같은 현상은 우
 리들이 성실하게 대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 요구되는 것은 진정한 연구
 이지, 간단한 평가 혹은 '선고(宣告)'가 아니며, 보고도 못본 체하는 무관
 심이나 내버려 두고 상관 없이 방치해 두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
 이다.
   문학 현상 혹은 문화 현상으로써의 '김용열(金庸熱)'과  '무협소설열(武
 俠小說熱)'은 확실히 우리들이 주의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데, 예를 들
 어 '열(熱)'의 원인으로 아래와 같은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대륙의 독자에 대해 말하면, 소비 문화 심리의 약간  기형적인 표
 현이라 할 수 있다.
   김용, 양우생, 고룡 등의 '신파(新派) 무협 소설'은 홍콩, 대만, 국외 등
 지에서 1950년대 초부터 이미 유행하기 시작하여 대단한 영향을 끼쳤으나
 그때 대륙은 여전히 정치, 경제, 문화가  폐쇄되고 감금된 와중에 있었다.
 사람들이 접할 수 있었던 '문예(文藝)'란  대부분이 '인식작용(認識作用)'
 과 '교육작용(敎育作用)'의 산물이었을  뿐, '심미작용(審美作用)'은 그다
 지 중시되지 못했고, '오락작용(娛樂作用)'은 비록 대역무도까지는 아니었
 으나 적어도 '대아당에 오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문화혁명(文革)'이 끝나자, 대륙의 정치, 경제, 문화가  개방되어 사
 람들의 심미(審美)에 대한 욕구와 소일거리 및 오락에 대한 욕구가 '시대
 의 요구에 부응하여'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자연스럽게 대만의 경요(애정
 소설 대표 작가)나 홍콩의 김용(무협 소설 대표 작가)과 영합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일거리와 오락 등 '소비 문화 심리'에 어느 정도  '기형적'인
 부분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문화대혁명'에 의해 감금되고 압제
 되고 더 나아가 소멸되었었다가, 새로운 시기에 다시  소생한 후 어느 정
 도는 심하게, 어느 정도는 잘못을 바로 잡으려다 지나쳐 오히려 반발심을
 사서 나쁘게, 또 어느 정도는 종류가 너무 많아 다 접하기조차 힘들게 되
 어, 마치 부자는 '콜레스테롤'이 무서워 고기를 삼가지만, 가난한 자는 극
 심한 굶주림 속에서 고기를 못 먹은 것이 한이 되어 오로지 고기가  좋다
 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을 낳았기 때문이다.
   둘째, 고사(故事)와 전기(傳奇) 자체의 매력 때문이다.
   '소비 문화 심리'와 그에  의한 다소간의 기형적인 팽창만을  얘기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특히 전기(傳奇) 고사를 듣는 것을 더욱 좋아하는 보
 편적인 인류의 심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마치 어린애들처럼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며,  '그
 후엔 어떻게 되었는가'를 묻기를 좋아한다. 또 '기이한 이야기'를 좋아하
 며 '복잡하고 색다른' 것을 더더욱 좋아한다.
   무협 소설은 다른 유형의 소설, 즉 탐정 소설, 추리 소설, 스릴러  소설,
 신비 소설, 공상과학 소설 등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심리에 부합되기 때문
 에 크게 환영을 받은 것이다.
   세번째, 무공과 협의의 '문화적 특산물'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들은  중
 국의 무협 소설의 원류가 아주 오래 되었기  때문에 김용과 '김용열(金庸
 熱)'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김용의 무협 소설은 중국인에게는 '익숙한 낯선 것'이었다. 익숙하다는
 것은 그 안의 '무공'과 '협의'를  말하는 것이며 낯설다는 것은 그  안의
 줄거리, 고사(故事), 인물을 말하는  것이다. '무공'은 '중국  쿵후'이므로
 중국인들에게는 진실로 아름답고 특별한 것이다.  '협의'는 수천 년의 봉
 건 전통과 '비합법적인 정치',  즉 '인치(人治)'이지 '법치(法治)'가 아닌
 정치를 겪은 중국인들이 더더욱 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모든 중국인들은 일면으로는 강자가 지존이 되고, 법도 하늘도 없는 그
 러한 세계 속에서 '무법(無法)의  법'을 묵인하지만, 또 다른  일면으로는
 모든 허약하고 힘없고 비천하고 겁이 많고 나약하며 조금의 안전감도  없
 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환상 중에 '협의'를 행하는 '구세주'를  기다리
 며, 그 구세주가  '위험과 고난에서 구해주고',  '빈부를 균등하게 해  줄
 것'을 바라기 마련이었다.
   이 점은 현재 국내외의 중국인들을 보아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다. 다시 말하면 한편으로는 하나의 문화적 유전이자 그 심미적 현상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 더 깊이 생각해 보자면 중국인들의 골수에 박힌 비겁한
 자아의 본능적인 환상과 희망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네번째는 중국의 형식과 중국의 작파(作派)의 매력 때문이다.
   국외의 중국 교민들에게 무협 소설은 신파(新派)이든 구파(舊派)이든 상
 관없이 친숙한 민족 형식이요, 중국  작파(作派)의 상징이다. 그것을 읽으
 면 고사(故事)와 전기(傳奇), 무공과 협의 등등의 일반적인 흡인력 외에도
 특수한 친밀감이 있어서 그것을 민족 문학 형식의 상징으로 보게 되는 것
 이다. 또한 중국의 독자들에게는 비록 내용과 형식이 약간 복잡하게 느껴
 지는 감은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마찬가지로 무협 소설은
 장회(章回)나 설화(說話)같은 류의  형식 및 서사  방법, 언어에서부터 그
 안의 내용과 인물, 생존 환경, 생활의  가치관 및 마음 속의 고통과  희망
 등등에 이르기까지 '민족 문화  형식'의 친근한 상징이  아닌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신문학'이나 '순문학'이 무슨  '외국문학'이나
 '이민족 형식'인 것은 아니지만, 그  가운데는 외국 문학의 형식과  관점,
 가치관, 더 나아가서는 취미  등등의 영향을 받았음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오사(五四)'의 신문학은 '옛것도 아니고(非古)', '서양의  것도 아닌(非
 洋)', 특수한 '신형식(新形式)'이었다. 최소한 순수한 '민족 형식'은  아니
 었으며, 작게는 구둣점의 사용, 서술하는 언어의 길이와 규범에서부터, 크
 게는 소설의 주제 및 그  줄거리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미  순수한
 '중국의 작풍(作風)'과 '중국의 기질'이 아니었다. 최근 몇십  년 간의 중
 국 대륙의 문학은 더더욱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의 각종  '전통'
 을 모두 내버리고 혁신적인 문학 관념 체계와 예술 형식을 창조하고자 기
 도하고 있다. 이것은 전문적이고도  과학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므로,
 이에 대해 우리들이 어떠한 평가를 내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최
 소한 우리들이 현재 '인식하고' 있는 '중국 문학'이라는 것이 반드시  인
 민 대중들이 진정으로 즐겨 듣고 즐겨 보는 '민족 형식'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해 준다.
   김용 등의 무협 소설에 대한 모두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이  바로 '타향
 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것 같은' 친밀감을 만들어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마땅히 무협 소설을  일률적으로 논해서는 안 된
 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의 뛰어나고 못한 차이, 고
 하(高下)의 구분은 천양지차이다. 동시에 사람들이 무협 소설을 읽는 원인
 도 일률적으로 논해서는 안  된다. 그 가운데의  '고인(高人)'과 '고품(高
 品)', '저인(低人)'과 '저품(低品)'의 차이 역시 대단히 심하다. 품격(品格)
 이 서로 비슷한 김용, 고룡, 양우생 같은 작가들 사이에도 역시 서로 다른
 '풍격(風格)'이 있으니, 마찬가지로 품격이 서로 비슷한  독자들 사이에도
 역시 서로 다른 '느낌'이 있기 마련일 게다.
  
   三
  
   각설하고, 김용에 대해 얘기해  보자. 김용의 성(姓)은  김(金)이 아니라
 사(査)이다. 본명은 사량용(査良鏞)이다. 많은 독자들은 이미  '김용(金庸)'
 이라는 이름이 사량용(査良鏞)의 용(鏞) 자를 둘로  나눈 것에서 비롯되었
 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김용 선생은 1925년  절강성(浙江省) 해녕현(海寧縣)  사람이다. 이것은
 김용의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녹정기(鹿鼎記)>> 같은 소설의 후
 기 혹은 주석 가운데서 살펴볼 수 있다.
   '해녕사가(海寧査家)'는 실로 대단한 권세를 지닌  집안으로, 역대로 인
 재를 배출해낸 명문이다. 예를 들어 청대(淸代)의 가장 유명한 시인이었던
 사신행(査愼行)이 바로 해녕사가(海寧査家) 출신으로 김용 즉 사량용(査良
 鏞)의 조상이다. 그때 이 일가에는 '한 문중에  진사가 일곱이요, 숙질 가
 운데는 한림원의 관리가 다섯'이었으니 과거 급제한 인재가 얼마나  많았
 는지를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김용의 조부만  해도 강소성(江蘇省) 단양현
 (丹陽縣)의 지현(知縣:현의 지사)을 지냈다. 이는 소설 <<연성결(連城訣)>>
 의 후기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김용의 작품을 읽고
 이해하고 김용의 '뿌리'와 더 나아가서는 김용 자신이 많은 방면에서  보
 인 뛰어난 공헌에 대해 명백히 하기 위해서이며,  또한 홍콩의 명인(名人)
 이 되고 심지어는 '명인 중의 명인'이라고까지 불리는 것이 이 '조상들의
 음덕'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신중히 고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김용의 소설 중에서 우리는 이미 각 사람의  인생 역정 및 그 일
 의 성취는 자신의 기회와 노력에 달려 있지 조상의 음덕이  어떠한가와는
 큰 상관이 없음을 볼 수 있다.
   김용 소설 중에는 수많은  '명문의 자제'들이 몰락하여  거지나 노예가
 되고 심지어는 간악무도한 모리배가 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또한 미천
 하고 보잘 것 없는 자나 내력이 불분명한 고아가 일대의 대협(大俠), 호사
 (豪士)가 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당연히, 명문의 자제가 열심히 노력하
 여 '가문을 빛내는' 경우도 물론 많이 있다.
   김용의 성취는 대부분 그의  고학(苦學), 성실, 재능, 학식  및 꾸준하고
 성실한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김용이 항주(杭州)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중일전쟁을  만나 난세(亂
 世)의 괴로움을 겪으며 고향을 떠나  타향을 떠돌게 되었다. 이것은 김용
 의 소설 가운데에서 다분히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김용은 '난세의
 어려움과 이별의 고통'에 대해 썼는데 자기 자신이 몸소 겪은  이 내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동안 유랑의 시기를 거친 후에 국립정치대학(國立政治大學)에 입학하
 여 외국 문학을 전공했다. 일설에는 그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그만두었
 다고 하나 그 자세한 원인은 알 수 없다.
   김용이 대학을 떠날 즈음,  당시 중국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영향력이
 큰 신문인 <대공보(大公報)>에서 전국 범위로 기자를 공개 채용했는데, 삼
 천여 명의 시험 응시자 중에서 김용이 채용되었다. 김용은 이로부터 죽을
 때까지 신문 일과 깊은 인연을 갖게 되었다. <대공보(大公報)>에 취직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홍콩지사로 파견되어 번역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김
 용은 이 신문사에서 오랫동안 일했으나, 후에 사정으로 인하여 떠나게 된
 다. 이 시기에  김용은 영화  사업에 흥미를 느끼고  '요복란(姚馥蘭:Your
 Friend의 음역)'이라는 이름으로 신문에 영화 평을 발표하여  자못 영향력
 을 발휘했다. 또 '임환(林歡)'이라는 이름으로 영화 평을 쓰고, 대본을 썼
 으며, 심지어 직접 영화사에 들어가 연출 작업을 맡기도 했다.
   1955년, 동료이자 좋은 벗인 양우생(梁羽生) 등의 영향을  받아 무협 소
 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그는 어떠한 형식의 소설도 써본 적이 없
 었다.
   그 처녀작이 바로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일명 <<서검강산(書劍
 江山)>>인데, 발표하자마자 온 세상을  놀래키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는
 명성을 날리게 되어 쓰는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사조영웅전(射雕
 英雄傳)>> 일명 <<대막영웅전(大漠英雄傳)>>을 발표할 때에는  가히 무협
 소설의 대종사(大宗師) 혹은  '진명천자(眞命天子)'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에 김용은  다른
 신문사를 떠나 그의 중학교 동창인 심보신(沈寶新) 선생과 함께 <명보(明
 報)>를 창간했다. <명보(明報)>의 초창기에 김용은 이 신문에 <<신조협려
 (神雕俠侶)>>를 연재하여 독자 및 정기 구독자들을 끌어들였다. 그의 무협
 소설과 그 성공적인 명성이 그가 설립한 <명보>에 엄청난 작용을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후, 그의 대부분의 무협  소설 작품은 최후작인 <<녹정기(鹿鼎記)>>
 에 이르기까지 모두 <명보>에 발표되었다. <<녹정기>>의 연재를 끝낸 후
 로 김용은 절필하고 더이상 무협 소설을 쓰지 않고 있다.
   많은 독자들이 '김대협(金大俠)' 김용이 대체 어떤  무공 솜씨를 지니고
 있는지 십분 관심이 많을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김대협은 태극권의 이론
 에 정통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내공도, 외공도, 경공이나 암기도  전혀
 못한다고 한다. '구양진경',  '구음진경', '건곤대나이'  등등의 실제적인
 쿵후도 김대협은 단지 '말할'  수만 있을 뿐  실제로 '펼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김대협은 '무(武)'는  못하나 '무(舞)'는 할  줄 알았으니, 어렸을
 적 그는 발레를 배운 적도 있고 고전 음악에 대해서도 높은 소양을  지니
 고 있었다. 그 밖에 또  바둑 두기를 좋아해서 '쌍륙(雙六)과  바둑의 수'
 및 그 이치에 아주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부었다. 수많은 대륙과 대만
 의 바둑 고수들이 김용의 친구였으며, 프로 기사들은 홍콩에 있는 김용의
 집에서 기예를 절차탁마하거나, 이론을 이야기하며 지내곤 했다는 미담이
 많이 전해 온다.
   자연히 김용이 가장 시간을 들인 것은 '문리(文理)'이지 '무술(武術)'이
 아니었다. 김용이 모은 장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과 부러움을 살 정
 도로 양이 많았고, 그의 넓으면서도 깊은 독서의  범위 역시 사람들로 하
 여금 존경과 탄복을 연발케 했다.
   근래, 김용은 불학(佛學)에 대한  흥미가 깊었는데 다분히 '득도(得道)'
 의 경지에 이른 듯하니, 이것은 김용의 소설 중에서 대체로 만나볼 수 있
 거나 추측할 수 있다.
  
   四
  
   다시 그의 소설을 이야기해  보자. 김용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위에서
 말한 몇가지 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고,  대개 그 정도만 이야기하면
 충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마주한 것은 바로 김용의 소설이기 때
 문이다.
   대개 많은 독자들은 김용이 일찍이 자신의 주요 소설 제목의  앞글자를
 따서 14자로 된 한 편의  대련(對聯)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대련은 다음과 같다.
  
   비(飛)-<<비호외전(飛狐外傳)>>
   설(雪)-<<설산비호(雪山飛狐)>>
   연(連)-<<연성결(連城訣)>>
   천(天)-<<천룡팔부(天龍八部)>>
   사(射)-<<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
   백(白)-<<백마소서풍(白馬嘯西風)>>
   녹(鹿)-<<녹정기(鹿鼎記)>>
  
   소(笑)-<<소오강호(笑傲江湖)>>
   서(書)-<<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신(神)-<<신조협려(神雕俠侶)>>
   협(俠)-<<협객행(俠客行)>>
   의(倚)-<<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벽(碧)-<<벽혈검(碧血劍)>>
   원(鴛)-<<원앙도(鴛鴦刀)>>
  
   여기에 <<월녀검(越女劍)>> 한 부를 더하여 총 15부의 작품이 있다. 그
 중 <<월녀검(越女劍)>>, <<백마소서풍(白馬嘯西風)>>, <<원앙도(鴛鴦刀)>>
 세 부가 중단편 소설이고 나머지 12부는 장편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김용은 1955년 무협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처녀작이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이다. 최후의  소설과 절필한 시간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說)이 있다. 하나는 <<월녀검(越女劍)>>으로 1970년 1
 월에 지었다는 설이다. 김용 자신이 이 설을 견지하면서 <<녹정기>> 후기
 에서 '15부의 장편 소설을 15년간 썼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설은 <<월
 녀검(越女劍)>>이 분명 김용이 최후로 구상하고  써낸 작품이라는 사실로
 뒷받침 된다. 또  다른 설은  <<녹정기(鹿鼎記)>>가 바로  최후로 절필한
 '봉도지작(封刀之作)'이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김용 본인 역시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녹정기>>는 1969년 10월 24일 <명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1972년 9
 월 23일 완성했으니 총 2년 11개월간 연재한 것이다. 내가 연재하는 습관
 은 매일 한 단락을 써서 그 다음날 연재하곤 했으므로 이 소설 역시  2년
 11개월간 써낸 셈이  된다. 만일 특별한  의외(살아가는 가운데는 언제나
 특별한 의외의 일이 있기 마련)이  없다면, 이것이 내 최후의 무협소설이
 될 것이다. -<<녹정기>>의 후기(後記)에서
   
   아주 분명한 점은 <<녹정기(鹿鼎記)>>가  <<월녀검(越女劍)>>보다 빨리
 쓰기 시작했으나, 끝난 것은 <<월녀검>>보다 늦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
 용의 진정한 절필작은 마땅히 <<녹정기>>이며, 이것은 김용이 15부를  쓰
 는데 15년이 걸린 것이 아니라 17년이 걸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용의 모든 작품은 전부 우선 신문에 연재되었다가 후에 다시  수정하
 여 책으로 출간되었다. 수정 작업은 1970년  3월부터 시작하여 10년이 걸
 린 1980년 끝났다. 김용의 거의 모든 저작은 대폭의 수정을  거쳤고, 소수
 의 작품은 심지어 '진면목(내용)'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했다.
   이 점이 의미하는 바는, 대륙의 독자들은 당시 국외의 신문에 연재되던
 김용의 작품을 읽을 행운을 누릴 수 없었으나(물론 극소수의 사람들은 이
 러한 행운을 누리기도 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결국 1980년대 전후
 에 전부 접할 수 있었으며, 또한 대부분이  바로 그 '수정본(修訂本)'이었
 다는 사실이다. 또한 책으로 나온 그 소설의  완전성과 예술 성취가 당시
 연재되던 것에 비해 당연히 더 좋았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매
 일 매일 읽으며 다음  얘기에 마음 졸이고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었으니,
 이런 것을 일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필자가 책에서 언급하는 '김용'은 전부 '수정된 후의 김용'이지  '연재
 될 당시의 김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필자가 본, 그리고 볼 수 있었던 것
 은 오직 수정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연재본(連載本)'과 '수정본(여러
 차례에 걸친 수정본을 모두 포함하여)'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상당한 차
 이가 있으나, 안타깝게도 필자는 언급할 방법이 없다. 다시 말해  그 사이
 의 차이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전문적인 연구 과제가 된
 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다만 '이 김용'에 대해서만 밝
 히지 '저 김용'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기로 한다. 이 점 독자 제현의 넓은
 아량과 이해를 바란다.
   김용의 이 15부의 작품은, 길이도 다르고, 써낸 시간과 방법  역시 모두
 다르므로 그 성취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많은 독자들은 '너는 김용의 소설 중에 어느  것, 혹은 어떤 부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서로 토론하기를 좋아한다. 김용을  만나볼 수 있었던 행
 운을 지닌 사람이 작가 김용에게 직접 물었다. '당신 자신은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김용은 아주 교활하면서도 실제적인 대답을 했으니 그 대답은 바로 '장
 편이 중단편보다 좀 낫고, 나중에 쓴 것이 먼저 쓴 것보다 좀 낫다'는 것
 이었다. 이 대답은 이치에 맞는 대답이니, 내가 보기에도 대체로  정말 이
 와 같다.
   <<백마소서풍>>, <<원앙도>> 및 <<월녀검>>(비록 가장  늦은 작품이기
 는 하지만)은 다른 12부의 장편에 비교하면  대체적으로 약간 뒤떨어지는
 감이 있다. 김용이 중단편을 쓸 때는  '신경을 덜 써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김용이 중단편의 내용이 발전되자마자 '허둥지둥 끝마친' 탓에 그럴
 수도 있다. 혹은 중단편 소설의 길이가 근본적으로  무협 소설에 맞지 않
 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나중에 쓴 것이 먼저 쓴 것보다 좀 낫다'는 말도 사실이다. 처녀
 작인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은 비록 아주 뛰어난 처녀작이고, 또 사
 람들이 천지를 놀라게 한 작품이라고 평가하였으나, <<사조영웅전(射雕英
 雄傳)>>이나, 혹은 더 뒤의 작품인  <<천룡팔부(天龍八部)>>, <<녹정기(鹿
 鼎記)>> 등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크게 손색이 있다. 왜냐하면 후기의 김
 용은 '천인(天人)' 혹은 '천재(天才)'일 뿐만 아니라 '진명천자(眞命天子)'
 였기 때문이다. 또한 '신성(新星)'이나 '거성(巨星)'일 뿐만 아니라 '무림
 지존(武林至尊)'이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김용의 소설 창작이 대체적으로 초기, 중기,
 후기의 3기로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중기의 작품이 초기보다 훨씬  낫고,
 후기의 작품은 중기보다 낫다.
   초기의  대표작으로는   <<서검은구록>>, <<벽혈검>>,   <<설산비호>>,
 <<비호외전>>이 있다.
   중기의 대표작은  '사조삼부작(射雕三部作)'이라고 불리는   <<사조영웅
 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와 <<연성결>>이 있다.
   후기의 대표작은 <<협객행>>,  <<천룡팔부>>, <<소오강호>>와  <<녹정
 기>>가 있다.
   당연히, 이것은 단지 필자 본인의 관점일 뿐이지만, 그래도 많은 동료들
 과 친구들의 동의를 얻은 바 있다. 하지만  반드시 확실하다고 단언 내릴
 수는 없으니, 소위 '인자(仁者)는 인(仁)만 보고, 지자(智者)는 지(智)만 본
 다'라든가, '모든 사물에는 각기 쓰이는 바가  있다'라는 등과 비슷한 이
 유 때문이다. 그저 나는 여기에서 김용의 무협 소설을 논함에 있어, '조금
 도 꺼리지 않고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하려고 할 뿐이다.
   한 친구가 김용 소설에 대한 나의 관점과 소위 '좋고 나쁨'에 대한  의
 견을 물었던 적이 있는데 난 그때 '칠상팔하(七上八下)'의 학설(일곱 가지
 는 뛰어나고, 여덟 가지는 뒤떨어짐)을 가지고 대답했었다.
   나는 김용의 총 15부의  작품 중에서 일곱 가지는  '상품(上品)'이지만,
 나머지 여덟 가지는 그저  '중품(中品)', 혹은 '하품(下品)'이라고 생각한
 다.
   뛰어난 일곱 작품은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협객행>>, <<소오강호>>,  <<천룡팔부>>, <<녹정기>>이다.  뒤떨어지는
 여덟 작품이 무엇인가는 더 말하지 않아도 분명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이 '뛰어난 일곱 작품' 중에서도 특히 <<천룡
 팔부>>와 <<녹정기>>가 훨씬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농담
 조로 '칠걸(七傑) 중에 양절(兩絶)이 있다'고 얘기하곤 하는데, 위에서 말
 한 일곱 작품은 의심할 여지  없이 모두 '걸작(傑作)'이요, 이  일곱 개의
 걸작 중에 <<천룡팔부>>와 <<녹정기>>는  가히 '절작(絶作)'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 '뛰어난 후배'가 없다고는 감히 단언할 수 없지만, '뛰어
 난 선배가 없다'는 것은 분명 확실하다.
  
   五
  
   다시 그의 '학문'에 대해 얘기해 보자. 1980년 10월 12일,  대만의 심등
 은(沈登恩) 선생이 홍콩의 <명보(明報)>에 광고를 하나 냈다.
  
   <특별한 분을 모십니다.>
   예광(倪匡)이 집필한 김학 연구의 제1집인 <내가 본 김용 소설>은 김용
 소설에 대한 중국 최초의 계통있는 전문적인 연구 서적으로, 초판은 이미
 절판되었고, 재판을 찍어 현재 홍콩의 각 서점에서 판매 중에 있습니다.
   <명보>에서는 이 책을 평가하여, <예광은 그의 미묘하고 운치가 넘치는
 필체로 깨달은 바를 적었는데, 침울한 느낌은 전혀 없고, 한번에 독자들을
 사로잡아 단숨에 책을 다 읽게 만드니 이것이 바로 이 책의 가장 큰 특색
 이다>라고 논했습니다.
   <<김학 연구>>는 총 10집이 출판될 예정으로 있는데, 명 작가들을 초청
 하여 집필하는 것 외에도 특별히  독자들의 투고를 환영하는 바이니 <내
 가 본 김용 소설> 출판에  참여 하시기 바랍니다. 원고료는  특별히 많이
 드리며 이번 달 말까지 원고를 받겠습니다.
  
   이 한 편의 광고는 <<김학연구총서(金學硏究叢書)>>의 서막을  연 동시
 에 국외에서의 '김학(金學)' 연구의  서막을 연 것이었다. 심등은  선생은
 또한 <백 년에 하나 나온 김용> 등의 글을 써서 '김학'의 동기와 의의에
 대해 더욱 자세히 논술하고, <<김학연구총서>>를 주관하여 집필했다.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자료에 의거하면, 대만의 원경출판사업공사(遠景
 出版事業公司)에서 심등은 선생이  주관하여 출판한 <<<김학연구총서>>>
 는 지금까지 10권을 넘어선지 오래 되고 20권  가까이 출판되었다. 그 중
 주요한 저작으로는 <내가 본 김용 소설>, <다시 본 김용 소설>, <세번 본
 김용 소설>, <네번 본  김용 소설>, <다섯번 본  김용 소설>(모두 예광이
 썼음)이 있고, <여러 사람들이 본 김용> 1, 2, 3, 4(총 4집으로 삼모(三毛),
 나용치(羅龍治), 옹령문(翁靈文), 두남발(杜南發)  등이 함께  썼음)가 있으
 며, <소오강호에 대한  담론>, <설산비호와 원앙도  분석>, <천룡팔부 감
 상> (모두 온서안(溫瑞安)이  썼음), <독김용우득(讀金庸偶得)> (서국치(舒
 國治)), <밤을 새워 읽은 김용> (설흥국(薛興國)), <김용이 그린 세계에 대
 한 만필(漫筆)>  (양흥안(揚興安)), <김용의  무협 세계>  (소조기(蕭兆基)),
 <위소보 신공> (유천사(劉天賜)), <정에 대한 탐색과 신조협려> (진패연(陳
 沛然)) 등등이 있다.
   이런 이유로 국외의 '김학'이 결코 '나라 밖에서 벌어지는 괴상한 이야
 기'가 아니라 실제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믿는 것
 이다. 이런 현상이 생겨난 근본 원인은 김용이  '백 년에 하나 나오는 김
 용'(심등은의 말)이기 때문이며, 또 '김용의 소설이 홍콩, 대만, 남지나해,
 북미에 유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침식을 잊고 빠져 들었으며, 중국 대륙
 에서도 김용 소설을 접할 수 있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
 한 상황은 지금까지도 전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김용의 소설은 모
 든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어서, 위로는 대학 교수나 국가 원수로
 부터, 아래로는 상인, 심부름꾼,  하인, 머슴에 이르기까지 진정으로  모든
 사람이 함께 감상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김용은 중국 근대사상 가장 많
 은 독자를 포용하는 소설가>(예광의  글 <무협 소설의 대종사  김용>에서
 인용)라고 한 말이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 소설의 대종사(大宗師)와 중국인이  있는 전세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그의 소설 작품, 그리고 종이 값이 오를  정도로 책이 잘 팔리는 '열현상
 (熱現象)'(묘한 것은 이 '김용열'이 오랫동안 식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대상으로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하나의 '학문'이  이루어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六
  
   김용 무협 소설의 오묘함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아마  김용의
 책을 읽고 김용을 사랑하는 독자들이라면  항상 부딪히는 문제일 것이다.
 혼자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고, 남에게도 물어보고, 남에게 질문 받기도 한
 다. 두세 명의 '지기'가 서로 만나 깨달은 바를 이야기 하고 심지어는 밤
 을 새워 가면서까지 서로 읽은 평을 나누고, 그것에 대해 담론하곤 한다.
   김용이 대체 이렇듯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또  그 인기가 조금도 쇠
 하지 않은 채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김용을 '백 년에 하나 나온 기재'니, '조설근(曹雪芹:홍루몽의 작가) 이
 래 최고의 작가'라느니, '중국  문화와 문학의 또 한번의  기적'이라느니,
 '중국 전통 백화 문학의 새로운 최고봉'이라느니 하고 칭하는 이유는  무
 엇인가? 또 국외의 문인과 학자들이 너도 나도 글을 발표하여  김용을 하
 나의 '학문'으로 연구해야 하는 위대한 작가처럼 내세우는 이유는 무엇인
 가?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는 결국 다음의 한  가지 문제에 귀결된다. 김용
 의 오묘함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김용 감상평(金庸賞評)-아속편(雅俗篇)>>에서 다음과  같은 글
 을 쓴 적이 있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김용의  소설은 진실로 아주 통속
 적이면서도 고아하고, 또 고아하면서도 속된 그런 이야기이다. 그것의  장
 점은 바로 그것이 속되면서도 고아하고, 통속적이면서도 심각하며, 흥미진
 진 하면서도 배울 점이 잇고, 재미있는 구경거리이면서도 진리를 찾을 수
 있고, 또 신기하고  기이하면서도 진실이어서 사람들의  오락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대단히 풍부한 미학적, 철학적인 맛을 감상할 수 있다
 는 데 있다. 그것은 무협과 전기의 내용을  담은 일종의 '성인들의 동화'
 이며, 동시에 인생과 세계에 대한 심각한 우언(寓言:교훈)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총괄하면, 바로 고아함과  속됨(雅俗)을 함께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속을 함께 맛본다'는 아속공상(雅俗共賞)이란  말은 전혀 낯설게 들
 리지 않으며, 심지어는 항상 하는 말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문학 예
 술 작품('순문학'과 '속문학'의 차이를 떠나서)이 진정코 아속공상(雅俗共
 賞)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속공상(雅俗共
 賞)은 문학 예술의 가장 높고 가장 위대한 경지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늘 하는 말로 '볼 수 있는 것을 보면 진리를 찾고, 볼 수 없는 것을 보
 면 구경을 한다'는 말이 있다. 소위 '아속공상(雅俗共賞)'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모두를 맛볼 수 있게 한다. 바꿔 말하자면, '구경'
 도 할 수 있고 '진리'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은 소설을 '흥미진진하게'(즉 구경거리로)  쓰는 일이 절대로 쉽
 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한 '배울 점이 있게' 쓰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는
 것도 안다. 진리를 담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인 것이다.
   만약 그것이 '흥미진진하면서'도 '인생을 생각하게' 한다면 하늘에  오
 르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김용의 소설은 뜻밖에도
 이 두가지를 다 만족시키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김용의 소설과 다른 무협 소설은 그다지 다른 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무협 소설 역시 긴장감, 곡절(曲折), 격정, 기복,
 풍부한 변화, 무공의 액션  등이 있고, 또 협의와  정의를 행하고, 원수를
 갚고 한을 풀고, 사랑에 빠지는 등등의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마찬가지로 김용의 소설도 다른 무협 소설과 마찬가지로 '재미있는  구
 경거리'와 '곡절'을 갖추고 있어서 '흥미진진함'이라는 무협 소설의  '필
 요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다.
   김용 자신이 항상 말하길, 그가 무협 소설을 쓰는 이유는 '자신을 즐겁
 게 하고, 또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 했다. 즉,  '오락(娛樂)'이 제일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김용은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 그저  '이야기를 말하는 송대(宋代)
 의 '설화인(說話人)'이나, 근대의 '설서선생(說書先生)'과  비슷할 뿐이다.
 나는 그저 이야기를 생동감 있고 재미있게 말하고자  할 뿐이다. 나는 어
 려서부터 무협 소설 읽기를 좋아했는데, 이러한 소설을 쓰는 것은 당연히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이며, 자신을 즐겁게 하고  또 남을 즐겁게 하
 기 위해서이다. 물론 금전상의 고료 문제도 있다.>(<여러 사람들이  본 김
 용>에서 인용)
   이 단계에서는 김용이 다른 무협 소설 작가들과  다른 점은 전혀 없다.
 그들도 모두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이며,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무협
 전기고사(傳奇故事)를 말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아주 곡절 있고 마음 졸이게, 또  긴장감 있고 감동적으로 이야
 기를 말하므로 사람들을 끌어당겨 계속 읽어나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하게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유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야기 중의 기이한 부분들은 어쩔 수 없이 많이 있게 마련이며, 그것을 전
 부 믿을 필요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단계에서  적지 않은 '문인(文人)  아사(雅士)'들이 그것을
 '깔보고 비웃으며' 이러한 무협 소설을  '제멋대로 지어낸 말도 안  되는
 허튼 소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소설을 완전히 황당무계하
 고 '문학의 생명을 목 조르는'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어 <<신조협려>>에서 소용녀가  절정곡의 벼랑에서 떨어졌어도
 죽지 않고, 아니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뜻밖에도 그 아래에서 16년 동
 안이나 살아 남은 것이라든지, 또 <<의천도룡기>>에서 사손과 장취산, 은
 소소가 뜻밖에도 작은 나룻배 하나에 의지하여 남극 대륙까지 떠내려  갔
 다든지 하는 것은 당연히 '믿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이
 러한 '과학적인 두뇌'로는 '성인들의 동화'를 이해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
 다. 왜냐하면 이미 기계화되고 경직화된  '과학적인 두뇌'에서는 이미 약
 간의 동심조차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분명 김용의 무협  소설도 역시  '제멋대로 지어낸'  것이요, 심지어는
 '말도 안 되는 허튼 소리'일 수 있다. 하지만 '제멋대로 지어낸' 것이 아
 니면 어디서 '무협'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또 '말도 안 되는 허튼 소리'
 가 아니면 또 어디에서 '전기'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원래부터
 유희가 아닌가 말이다!
   문제는 김용의 소설이 '유희'이면서도 그 안에 '맛(味)'이 있다는 점이
 요, '허튼 소리'이면서도 그 안에 또  '도(道)'가 있다는 점이다. 맛이 있
 고 도가 있으니 다른 일반적인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김용의 소설과 다른 소설들이 다른 점은 김용의 소설은 일률적으로 '기
 이함'과 '괴기함'을 추구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혹은 비의도적으로 그  안
 에 내재한 '맛'과 '도'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흥미진진'하
 면서도 '보기 어려운' 작품이 된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대부분의 무협 소설 작가와 작품은 김용의 뒤로 처지
 고 만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어떤 '고인(高人) 아사(雅士)'들께서는 그저
 수박 겉핥기 식으로 표면적인 '제멋대로 지은' '허튼 소리'만을 보지, 그
 안에 내재한 '맛'과 '도'는 전혀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선 김용은 일률적인 '전기'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진실을 구하고' 더불어 '사람에 대해' 쓴다.
   김용 소설의 오묘함은 그  사실이 비록 기이하나  그 사람은 진실되고,
 또 사람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지, 이야기가  사람을 이끌어 가고 있
 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일반적인 무협 소설은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사람, 특히 그 주인공이 선과 악, 정(正)과 사(邪)가 분명하고 협
 (俠)과 흉(兇)이 분명하게 대립될 뿐만  아니라, 이 인물들이 완전히 어떤
 개념(혹은 이념)의 공식에 딱 맞아서 한 번 보면 금새 알 수 있어서 심오
 한 맛이 조금도 없는 경우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근본적으로 무슨 인물의 성격이니  하는 것이 없고 그
 저 기이하고 괴상하고 황당 무계하며 심지어는 실수 투성이로 가득찬  하
 류의 저급한 '고사(故事)'나 '전기'인 경우이다.
   무협 소설이 '경시'당하는 이유도 이와 관계가 있다. 가장 많은 경우는
 이 두가지가 하나로 합쳐져 있는 경우인데, 개념의  공식에 딱 맞는 인물
 과 제멋대로 쓰여진 이야기인 경우로 짜여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용의 소설은 거의  처음 시작부터 인물들의 성격이  부각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절대적이다.
   김용 소설의 이야기의 줄거리는, 인물  성격의 발전이 요구하는 가능성
 과 필연성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신조협려>> 중의 소용녀가  벼랑에서 뛰어 내렸으나 죽지
 않은 것은, 첫째는 그녀가 양과를 끔찍이 사랑하여 그를 위해 희생하기를
 진심으로 원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녀가 어려서부터 고묘에서 성장하고
 또 '옥녀심경'을 연마하여 적막감을 견뎌낼 수 있었기 때문에 16년  동안
 을 안정되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 16년 후 양과가 벼랑에서 뛰어내린 것은 첫째로는 그와 소용녀의 사
 랑이 죽어도 변치 않을 정도로 지극하여 16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전혀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그가 원래 쉽게 극단에서 극단으
 로 치닫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 '사건'이 비록 '기이'하나, 이  '정(情)'이 '진실되고' 또
 한 아름다워서 많은 감동을 주고, 그 인물들의  개성이 더욱 생생하게 부
 각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용 소설에서 가장 감동을 주는 부분은 바로 인물
 이지 사건이 아니다. 인정(人情),  인성(人性), 인생(人生)이 그 삶과  생활,
 생명 속에 복잡하게 녹아 있으면서 두가지가 어울려 서로를 돋보이게  만
 들어 아주 독특하고 심각한 광채를 발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김용 소설은 '전기(傳奇)'와 '역사(歷史)'가 교묘히 결합하여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인 무협  소설은 항상 강호에서 벌어지는
 은원 관계와, 녹림에서 벌어지는 온갖 행악, 초야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활
 극을 써낸다.
   그러나 김용의 소설은  하나 하나가 전부  '역사'에서 끌어낸 '전기'인
 까닭에 그 혼연일체로 인해  중국 고대의 민족 영웅의  전기 고사(傳奇故
 事)가 되는 동시에 중국 고대의 영웅의 역사시가 되는 것이다.
   김용의 무협 소설의 대부분은 확실한 역사적 연대와 구체적인 역사  배
 경을 지니고 있다. 김용은 이렇게  하여 '신빙성'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의와 작용은 이보다 훨씬 뛰어났다. 단순히 '신빙성'을 가한
 외에도 역사에서 전기를 이끌어 냈다.
   김용 소설 중에는 많은  진인(眞人:역사적 인물)이 있으나 그들의  사적
 (事迹)은 대부분 전설이나 야사에서 나온  '거짓 사건, 혹은 믿기에는  좀
 부족한 사건'이다.
   김용은 또 허구적인 인물과 이야기를 가지고 아주 믿을만한 진실을  쓰
 고자 노력했다. 이렇게 하여  진짜 인물들의 거짓  사건과 가짜 인물들의
 진짜 사건이 서로 뒤섞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
 서 믿지 않을 수도 없게 만든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보
 자면 믿을 수 없지만 '예술적인 사실', 혹은 '철학적인 사실'이라는 측면
 에서 보자면 또 아주 믿을 만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은 독특한
 분위기와 깊은 함축미를 지니게 된다.
   '강호(江湖:전기)'를 쓰면서 '강산(江山:역사)'를 동시에  써내어 강호와
 강산 사이에서, 전기와 역사 사이에서  길을 찾아내어 '무림'과 '문단'에
 홀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바로 이러한 '역사에 대한 감흥'과 '인성에 대한 혜안'이 있
 었기에 김용의 소설은 초월적인  무협 소설의 '대경계(大境界)'를 이루게
 된다.
   김용의 소설의 특별한 점은  바로 한 눈에  '거대한 면'과 '커다란  기
 세', '커다란 포부' 및  '대경계'와 '높은 문필'을 알아볼  수 있다는 데
 있다.
   김용은 위대한 문필가이다. 그가 그려내는  무협의 세계는 가히 광대하
 면서 끝이 보이지 않고 '녹림(綠林)'의 세계에  그치지 않고 모든 세계에
 미치고 있으며, '강호'에서 멈추지 않고  '강산'과 '묘당'(廟堂:역사와 정
 치)에까지 미치고 있으며, '개인적인 싸움'에 그치지 않고  민족 전쟁, 천
 군만마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스케일이 웅대하고, 실마리가  극히
 다양하며, 시야가 아주 넓고, 기상천외하며, 기세가 큰 것이다!
   더욱 값진 것은 김용 소설이 '무림의 실제  기록'이나 '역사의 번안(飜
 案)'이 아니라, '무림'과 '역사'의 독특한 시공 속에서 그의 인생과 역사,
 세계, 생명, 인성, 정치, 국민성, 민족성 등등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써 내
 는데 뜻을 두어 '전생의 원한과 죄업' 속에 '연민'을 볼 수 있고 '커다란
 기세' 속에서 '대경계(大境界)'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김용 소설의 또다른 오묘한 부분은 '커다람(大)'을 볼 수 있을 뿐 아니
 라, '미세함(微)'까지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수미(須彌:우주)처럼 크고 겨
 자씨처럼 작은 것이 아주 오묘하게 섞여 있다.
   소위 '미세한' 부분이란 소설의 사소한 내용, 서술하는 언어, 무공의 초
 식 및 각종 지식과 학식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것들이 김용을 다른 소설
 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적인 무협 소설은  인물 묘사에 중점을  두지 않고 일률적으로  그
 '줄거리'의 괴이함과 곡절, 그리고 구조의  복잡함 만을 추구하여 소설의
 사소한 부분이나 언어, 무공의 초식 및 그  밖의 사소하고 지엽적인 것들
 에는 근본적으로 무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김용 소설은 사소한  부분에서의 주도면밀함과 서술한  언어의 고아함,
 교묘함, 유머, 유려함(대부분은 문언체 반,  백화체 반으로 매끄럽고 유창
 함)은 그의 소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뒤에서 감상하는 중에 구체적으
 로 거론할 것이므로 여기에서 일일이 예를 들지는  않고, 다만 김용 소설
 에서의 무공의 초식이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만을 얘기하고
 넘어가겠다.
   일반적인 무협 소설에서의 무공은 틀에 박혀 생기가 없거나 혹은  신기
 하고 괴이하거나, 또 혹은 아예 쓰지를 않는(혹은 다른 사람들 것을 그대
 로 베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예술성과 독창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김용 소설에서의 무공의 초식은 기본적으로 '시화(詩化)', '철학
 화', '성격화'되어 있어서 김용 무협 소설을  대단히 뛰어난 수준으로 끌
 어 올렸다. 소위 '시화'나 '예술화'란 대부분 시적  정취 혹은 심미적 정
 취가 충만한 명칭이다.
   예를 들어 '백화착권(百花錯拳)',  '당시검법(唐詩劍法)', '협객행무학총
 결(俠客行武學總訣)',   '암연소혼장(暗然銷魂掌)',   '자양신공(紫陽神功)',
 '낙영신장(落英神掌)' 등은 형상이 있고 시적인 맛이 가득하다.  또 '신행
 백변(神行百變)', '건곤대나이(乾坤大娜移)',  '흡성대법(吸星大法)', '능파
 미보(凌波微步)', '소무상신공(小無相神功)',  '소요장(逍遙掌)' 등등  역시
 형상이 선명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하면서도  또
 마음이 끌려드는 면이 있다.
   '철학화'란 김용 소설의 적지 않은 무공 초식에 포함된 '무학(武學)'의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중국  철학을 '활용'한 것이다. 예를
 들어 '백화착권'에서의 '이것인 척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남의  생각
 이 미치지 않는 틈을 타서 행동을 취하는(似是而非,  出其不意)' 오묘함이
 그러하다. 또 <장자.추수.포정해우(莊子.秋水.疱丁解牛)>의 '입신의  경지에
 이르러 박자에 잘 맞는(出神入化, 合節合拍)'  지고한 경지(이것 역시 '예
 술'), 또 장삼봉이 태극검(太極劍)을 가르칠 때 말한  '검의 뜻을 얻고 검
 의 초식은 잊어버리라'는 말이나, 또  풍청양의 '독고구검(獨孤九劍)'에서
 '산 무공에는 활용이 있을  뿐 원래 무슨 초식  같은 것은 없다'는  말과
 '자연을 따르고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라'는 등등 철학적인  이치
 를 생동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
   '성격화'란 김용의 소설에 있어서 인물들의 무공 초식이 종종 다른  인
 물의 성격과 서로 합치되고 통일되어 김용이 인물의 성격에 근거하여  인
 물들의 '연공(練功)'을 안배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곽정이 배운 것은 간단 명료하면서도 굳건한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
 이었고, 구양봉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음진경(九陰眞經)'을 거
 꾸로 연공했으며, 흑풍쌍살(黑風雙煞)은 '구양진경(九陽眞經)'에서 '최심장
 (催心掌)'과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 등의 음독한 무공을 연마했으며, 소
 용녀는 '옥녀심경(玉女心經)'을, 위소보는 '신행백변(神行百變)'을 정성을
 다해 연마했다. 위보소는 '신행백도(神行百逃)'라 불렸다.
   이와 같이 김용의 소설에서는 무공, 시의(詩意), 철학, 성격이 서로 섞여
 완전히 혼연일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무공의  '기술'과 '예술',  그리고
 '도(道)'와 그 '쓰임' 역시 마치 양자강과  황하가 도도하고 끊임없이 차
 례 차례 이어지면서 섞이듯이 완전히 합치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김용 소설의 오묘한 부분은  그 소설의 '형이상학적'인 부
 분과 '우언(寓言)의 구조'에 있다.
   일반적인 소설은 그저 '선(線)'적인 곡절과 상념 및 일률적으로 기괴한
 맛만을 추구하여 완전히 황당무계하다. 기이하고 색다르게 보이기는 하지
 만 오래 읽으면 무미건조하여 재미가 없는 것이다.
   이에 비교했을 때 조금 더 나은 것이 '면(面)'적인 구조로, 인물의 성격
 과 그 관계 및 '횡적인 연계'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그러나 김용 소설의 구조 형식은 많은 점(點)과 선(線)과 면(面), 그리고
 체(體)로 이루어진 '입체적인 구조'이다.
   김용 소설 역시 고사(故事)나 전기를 말하는 것은 똑같지만, '형식은 분
 산되어도 정신은 통일된' 경지에 이룰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소설이 사람에 근거한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인물과 그  성격
 에서 이야기가 발생되고, 이야기의 흐름을  제어하여 이야기가 인물에 부
 속되게 한 연고로, 그 이야기를 읽었을 때 이야기는 기억 못한다 해도 인
 물들의 성격만큼은 깊고 뚜렷하게 가슴속에 새겨 지도록 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외에 또다른 한가지가 있으니 바로 '문장(文)'에 근거했다는 점이다.
 무협 소설은 구조가 아주 정묘하거나,  '문체'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기는
 힘들다. 특히 김용은 매일 한 단락을  써서 그 단락을 연재하니, 소설  한
 부는 짧으면 몇 개월에서, 길면 <<녹정기>>처럼 2년 11개월, 거의 3년 가
 까운 시간을 써 내려가니 근본적으로 '전편을 고려할' 수가 없기  때문이
 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김용의  소설 역시  어느 정도 '신천유(信天游:중국
 민가의 일종으로 같은 곡조를 반복하여 노래 부를 때 곡조가 바뀌곤 함)'
 와 비슷한 형식 구조를 면할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은 많은 독자들이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김용 소설은 대부분 '형이상학적'인 '우언의 구조'를 갖
 추고 있고, 또 이야기에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철학적)인  우언 형식의
 층차(인생과 세계의 비극성에 대한 설명)가 있다.
   김용 소설은 그 소설의 결미가 어떠하든, 인물이 크게 성공하든 어떻든,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든 아니든 간에 모두 약간은  씁쓸하고
 망연한 느낌을 안겨 준다. 씁쓸함도 망연함도 그 정도가 대단히 심하다.
   그 여운이 무궁무진하고 의미심장한 고로, 이러한 느낌은 일종의 '예술
 적 향수(享受)'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느낌은  또한
 독자가 추측해야 하고, 맛을 보아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 철학적인 문제
 를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혹은 '해독'한다던가,  '해석' 한다든가,
 '구조를 분석'하면서 말이다.
   김용의 소설의 구조,  특히 '형이상학적'인 수준에서의  우언의 구조를
 환원(복원)하게 되면 깨닳음이 있게  되고, 무궁무진한 여운을 느끼게  된
 다.
   결론적으로, 모든 줄거리와 이야기, 인물  및 그들의 조우(遭遇)는 사실
 김용이 만들어낸 독특한 '가상 현실'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가상 현
 실' 안에서 인물과 사건이 다체롭고도 의미심장한 형상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김용 소설이 '흥미진진'하면서도 또한 대단히 '배울  점이
 많은' 근본적이고 심오한 원인인 것이다.
  
   七
  
   문학의 대가들이 대가라고 칭해지는 까닭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반복하
 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반복하지도 않는데 있다.
   김용이 바로 이러한 대가이다.
   일반적인 '속문학' 혹은 현대의  '상업문화'의 가장 명확한 특징은  그
 유형화와 고정된 형식화에 있다. 이것이 바로 '독창성'을 추구하는 '순문
 학' 작가나 비평가들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비판하는 중요한 원인 가
 운데 한가지일 것이다.
   무협 소설은 더욱더 일정한 유형과 고정된 형식을 갖는다. 인물의 고정
 화된 유형 뿐만 아니라 그 줄거리도 대부분은 일정한 형식이 있다.
   인물은 아주 간악하지 않으면 아주 충성스럽고, 아주 선하지 않으면, 아
 주 악하고, 아주 지혜롭지 않으면, 아주  멍청하고, 아주 정의롭거나 혹은
 아주 흉악하다.
   충성스럽고(忠), 선하고(善), 지혜롭고(智), 정의롭고(俠),  뛰어난 무공은,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에  몰려 있고 그에 반대되는  간사하고(奸), 악하고
 (惡), 멍청하고(愚), 흉악하고(兇), 비교적 뛰어난 무공(그래도 결국 의로운
 편보다는 약간 뒤떨어지게 마련) 역시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에  몰려 있
 다. 좋고 나쁨의 대비가 아주 선명하다.
   현대의 '신파(新派)무협소설' 역시 이미  어떤 고정적인 형식을 이루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학문과 예술로 원수를 갚는 부류'가 있고, '영웅과 흉
 악한 무리들이 서로 보물을 쟁취하는(무공의  비급, 보검 등) 부류'가  있
 고, '협객이 민족(소수민족)의 투쟁을 지지하는 부류'가 있고, '무림의 영
 웅들이 관부(이민족의 관부)에 항거하는 부류'가  있고, '은혜와 원수, 애
 정과 원한이 서로 뒤섞여 나누기 힘든 부류'가 있다.
   결론적으로, 복수를 하거나, 보물을 뺐거나, 의로운 일을 행하거나, 관부
 에 반항하거나, 공안(公案:탐정,  추리, 모험 등등)을  곁들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단지 이것들 뿐이다.
   김용의 소설은 그렇지 않다.  <<서검은구록>>은 아주 뛰어난  작품이며
 <<벽혈검>>, <<설산비호>>, <<비호외전>> 등등도  다른 사람들과 중복되
 는 부분은 없으며, 시대적 배경이 가까운(청나라 초기에 만주족에 반대하
 던) 소설들 끼리도 제각기 다르다.  주인공인 진가락은 재야로 들어간 서
 생(書生)이며, 호비는 어려서부터 강호를 유랑했으며, 원승지는 명인(名人)
 의 후예이다.
   <<사조영웅전>>에 이르러 김용이  여타의 무협 소설과  무협 소설가에
 끼친 영향이 인정되기 시작했다. 오묘하면서도 한층 오묘한 것은 '사조삼
 부작'의 세 작품이 기본적으로는  각각 풍격이 선명히  차이나고, 형식도
 창조적이면서 독립적이라는 사실이다.
   <<사조영웅전>>의 곽정은 소박하고 말주변이 없으며, 애정과 도덕이 비
 록 충돌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즐거움과 기쁨이 있으며 마침내는 아름다운
 사랑을 획득하여 인간 애정의 '정격(正格)'을 보여준다.
   <<신조협려>>의 양과는 경박한 면과 제멋대로인  면이 있고, 영리하며,
 임기응변에 능하고, 지극한 정을 지녔으며, 쉽게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
 이 있다. 그의 사랑은 '예교의 규율'에 막히지만, 그래도 그는  죽어도 후
 회하지 않아서 '변격(變格)'이라고 평해진다.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는 성격이 관대하면서도 유약하고, 총명하면서
 도 성실하며, 주위의 미녀들로 인해 종종 근심하고 방황하여 종종 그녀들
 의 선택을 따르곤 한다.
   더욱 오묘한 것은 이 세 소설의 '주제'와 '서사경향'이 대단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사조영웅전>>은 난세의 고통과 초야의 영웅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의로움을 행하는 것에 착안했고, <<신조협려>>는 뜻대로 되지 않는  애정
 과 고통의 세계를 다채롭게 그려내면서 독자들에게 '정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의천도룡기>>는 복잡한 인간성과 '남자들간의 감정' 등등에
 착안하여 써 내고 있다.
   그 이후 김용의 소설은 거의 매 편, 매 작품마다 새로움에 새로움을 더
 해 간다.
   <<협객행>>은 인생의 우언(寓言)을 썼다.
   <<소오강호>>는 '3천 년의 중국 정치 역사 중의  인성(人性)의 비극'을
 썼다.
   <<천룡팔부>>는 '정이 있으면 장애가 있기  마련이어서 억울함을 당하
 지 않는 사람이 없음'과 '인생의 고통' 및 '고난으로 뒤덮인  세계'에 대
 해 썼다.
   <<녹정기>>는 '국민성의 비극'과 '문화적 비극'을 썼다.
   <<협객행>>, <<소오강호>>, <<천룡팔부>>, <<녹정기>> 등 소설의 줄거
 리와 인물 성격은 조금도 공통된 부분이 없고, 그 서술 방식이나 구조 형
 식 및 언어 역시 계속 새로움을 추구했으며 동일한 부분이 거의 없다.
   3부의 중단편 소설 역시 서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커다란 흥
 미를 느끼게 한다.
   <<원앙도>>는 유머와 해학이  넘치고, <<백마소서풍>>은  무한한 감상
 (感傷)이 있으며, <<월녀검>>은 청순함이 돋보인다.
   이 세 여주인공(김용 소설에는 극소수의 여주인공이 있을 뿐) 가운데서
 도 <<원앙도>>>의  소중혜(양중혜라  해야 마땅하겠지만)의   천진난만함,
 <<백마소서풍>>의 이문수의 온유함,  <<월녀검>>의 '월녀(越女)' 아청(阿
 靑)의 순박함은 가히 천차만별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이 3부의 소설의
 줄거리나 구조 및 '주제' 역시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무공의 연마에 대해서도 제각기 차이를 보인다.
   진가락은 스승으로부터 백가권(百家拳)과 '백화착권'을  익혔고, 호비는
 '스승이 없이' 집안에서 전해오는 비급을 '혼자서 통달'했다.
   원승지는 화산파, 금사낭군 및 철검문  목상도장의 무공을 합쳐 연마했
 다.
   곽정이 연마한 방법은 '남들이 하루 익히면 나는 10일을 익힌다'는  것
 으로 그는 자질이 우둔하였기  때문에 더더욱 성실하고 근면하게  노력했
 다.
   양과는 부분 부분을 익혔고, 나중에는 뜻밖에도 조형(雕兄:수리형)을 만
 나 고도의 무공을 익힐 수 있었다.
   장무기는 기회와 인연이 딱 맞아 정(正)과 사(邪)의 무공을 함께 수련한
 데다가 또 중서(中西:페르시아)의 무공을 익혔다.
   개잡종이 연마한 것은 화근도 복이 되고 행운이 따라 뜻밖에 좋은 쪽으
 로 성공할 수 있었다.
   교봉은 천성이 용감무쌍했는데 종족의 유전  때문인 듯했고, 단예는 배
 우는 듯 배우지 않는 듯 했는데 그것은 그가 '때때로  영리하고 때때로는
 영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죽은 소림사의 무예를 연마했고, 또 소요
 파의 무공도 얻을 수 있었다.
   영호충은 화산파에서 배웠으나, 화산파를  초월하게 되고, 또  풍양청의
 '독고구검'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의 웅혼한 내공은 온갖 고초를 다 겪은
 후에야 얻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위소보는 비록 수많은 절세 고수들을 스승으로 섬겼지만, '신행백변'에
 약간 능한 것 외에는 기본적으로 무슨 무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위소보와 소설 <<녹정기>>가  김용 무협 소설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런 것들을 살펴 볼 때, 김용 소설의 변화 무쌍함을 가히 알 수  있다.
 김용의 '내공'은 장삼봉과  비슷하고, 그 초식은  '천변만겁(千變萬劫)'을
 추구했던 목상도장(木桑道長)과 비슷하다 하겠다.
  
   八
  
   이 '서론'으로 말하자면 이것으로도 이미 충분히 많은 내용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용 소설과  그 오묘함에 관해서  우리는 그저 빙산의
 일각만을 얘기했을 따름이며, 아직 그 표면밖에  다루지 못했다. 사실, 이
 것이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바로는, 국외의  <<김학연구총서(金學硏究叢書)>> 중에는 김
 용의 작품 전체를 다룬 논문도 없고, 한  작품씩 차례로 감상하고 평가내
 린 이러한 전문적인 저술도 없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래
 도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중국 대륙에서는 아직 '김학'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어떤 종류의 <<김
 학총서>>도 없을 뿐아니라, 전문적인 연구서  한 권도 없는 실정이며, 심
 지어 수년 전 발표한 극소수의 논문 몇 편도 그 길이나 형식에 제한을 받
 아 기본적으로 평범하고 얕은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으며, 김용과 국
 외에서의 김학에 대한  상황을 곁다리로 소개하는  형편으로, '평가'하는
 글이라 해도 간단하고 짧아서 사람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로 인해 나는 <<김용소설감상(金庸小說鑑賞)>> 혹은 <<김용입문(金庸
 入門)>>이라고 부를 이런 책을 써낼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우선은 대륙
 에 '김학' 연구의 붐을 일으켜 동료들과 함께 교류를 갖기를 원해서이고,
 둘째로는 나의 천견이 여러분의 고견을 이끌어 내는데 필요한 기초  작업
 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1996년 10월
  
   남창항공대학에서 문학박사 교수 진묵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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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통신 시절 갈무리해놨던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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