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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의 만찬 - 책소개

kcyland 2016.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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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한 초콜릿 CF를 통해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이었던 이영애는 ‘산소 같은 여자’에서 ‘장금이’로, 다시 ‘금자씨’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온 연기자다.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1995), 〈초대〉(1999), 〈불꽃〉(2001)으로는 도시여성의 세련된 감성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대장금〉(2003)으로는 단아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대장금〉은 국내에서 높은 시청률로 사랑받았을 뿐 아니라 해외 99개국에 수출, 방영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이영애’라는 이름을 알렸다. 그 후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2001)와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2005)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손꼽히는 여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최고의 배우이자 세간의 주목을 받는 셀러브리티 이영애. 그러나 2009년 결혼 후부터는 가정과 출산, 육아에 전념하며 아들 승권과 딸 승빈의 쌍둥이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 경기도 양평 문호리의 촌부로써 조용하고 소박한 삶을 꾸리고 있다.

여전히 우아하고 고혹적인 미모로 각종 패션지와 연예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이영애는 지금 스타와 셀러브리티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가는 중이다. 이 책은 한식 다큐멘터리... 〈이영애의 만찬〉을 6개월간 촬영하면서 조선시대의 왕가와 반가, 그리고 서민을 뛰어넘어 음식교류를 해왔던 소통과 나눔의 역사 발자취를 그려내고 있다. 요리 전문가나 한식 연구가는 아니지만 한식에 대한 사랑으로 비빔밥 홍보대사로 재능기부도 하는 등 한류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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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런던도서전 주빈국 한국 전시관, 『이영애의 만찬』 전시
SBS 〈이영애의 만찬〉 다큐에서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를 책으로 읽다!

왜 배우 이영애는 한식 문화를 소개하고자 했는가?

단아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이미지로 ‘산소 같은 여자’에서‘장금이’로, 다시 ‘금자씨’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온 배우 이영애. 최고의 배우이자 세간을 주목을 받는 셀러브리티 이영애가 결혼 후 가정과 출산, 육아에 전념하며 아들 승권과 딸 승빈의 쌍둥이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경기도 양평 문호리의 촌부로서 조용하고 소박한 삶을 꾸려오던 차, 이번에 한식 다큐멘터리를 계기로 그녀의 일상을 세간에 공개하게 되었다.

『이영애의 만찬』에서는 여러 역사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도움을 구했다. 역사학자에 따르면, 첩이란 반찬의 가지 수에 따라 정해지는데 모든 반찬이 첩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밥, 국, 찌개, 전골, 찜을 제외한 반찬을 첩으로 세는데, 그에 따르면 정조는 3첩이나 4첩에 불과했고 혜경궁 홍씨가 받은 수라상도 첩으로 계산하면 7첩이나 9첩에 해당되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12첩 상차림에는 얼마나 많은 음식이 오르는 것일까? 12첩을 차리기 위해서는 최소 스물한 그릇의 음식이 상에 오른다고 한다. 상다리가 휘청거릴 만큼 많은 양의 음식이다.
다.

한식 문화를 함께하며 이영애는 한식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들과 밥을 나누었는가?” 이를 계기로 그는 다문화 가정의 엄마들과 모여 음식을 나누기도 하고, 문호리의 이웃사촌들을 초청해 잡채와 불고기 요리를 대접하기도 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구찌 CEO를 비롯한 해외 인사들을 초청해 우리 음식을 선보였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삼청각에서 여러 인사들을 모시고 만찬을 연 것이다. 한국의 미와 아름다움을 선보이기 위해 한복디자이너 한은희 선생, 도예가 이능호 작가, 요리명장 이병우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한 달 넘게 도움을 받아 준비한 이영애의 만찬은 성대하게 열렸으며, 8코스로 마련된 음식 중 비빕밥은 테이블에 모인 4명의 사람들이 함께 비벼 나눠먹을 수 있도록 퍼포먼스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 음식은 나눠먹으면서 소통하는 화합의 만찬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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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음식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수업이 모두 끝나고, 드디어 왕의 밥상과 마주하는 날. 흔히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했던 왕의 밥상을 떠올리며, 갖가지 산해진미로 호화롭게 조리된 음식들의 향연을 기대했다. 그런데 막상 〈원행을묘정리의궤〉 속에 그림과 함께 등장한 정조의 밥상은 내가 상상했던 왕의 밥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따르면, 하루 5번 수라상이 올랐다 한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허기를 달래기 위해 죽이나 미음을 올리는 초조반(자릿초반이라도 함), 아침식사에 해당하는 조수라, 가벼운 점심에 해당하는 낮것상, 저녁식사에 해당되는 석수라, 그리고 늦은 밤 다과나 안주를 올리는 야참상이다. 조선의 임금은 하루에 식사를 다섯 번씩이나 하는 대식가였나 하는 오해도 잠시, 수라상 별로 올려진 음식들을 살펴 보니, 제대로 갖춘 식사는 하루 2끼, 조수라와 석수라뿐이고, 낮것상은 국수나 만두같은 면상이며, 초조반은 허기를 달려기 위한 간단한 죽상이다. 또한 야참상은 현대인들의 간식꺼리나 다름 없는 상이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도 아침과 점심 사이 시시때때로 강냉이며 옥수수, 초코릿이나 과일 같은 주전부리를 입에 달고 사니, 수라상을 셈하듯 꼽아 보면 나 역시도 하루에 대 여섯끼는 족히 먹는 셈이다.(pp27~28)

한국인의 잔치상에 빠지지 않는 잡채, 가히 국민요리라 할만하다. 게다가 파스타와는 또 다른, 당면의 쫄깃한 식감에 반한 것일까? 잡채는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한국의 대표 면 요리가 됐다. 그런데 우리가 잡채를 만들면서 당면을 쓰기 시작한 역사는 1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당면은 ‘호면’이라 하여 원래 중국에서 유래된 면이다. 1919년 일본인이 황해도에 당면 공장을 세우고, 당면을 대량으로 생산해 내면서 당면이 우리의 밥상에 오르게 됐고, 잡채에 당면이 들어간 것도 그 이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잡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종부님께서 잡채라며 내놓은 음식은 지금의 잡채와는 사뭇 다르다. 본디 잡채(雜菜)의 ‘잡’은 섞는다는 의미고, ‘채’는 채소를 뜻한다.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잡채’의 원형은 다양한 채소를 한데 섞어 내놓은 음식이었다. (p60)

듣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방식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조리법 아닌가? 그 오래된 조리법을 중원의 귀족들이 모를 리 없었을 텐데, 그들 사이에서 유행할 정도였다면, 맥적이라는 음식에는 뭔가 특별한 점이 있었을 법하다. 내가 질문을 하자마자, 마치 내 생각을 꿰뚫고 있었다는 듯, 조영광 교수님은 내 궁금증에 대한 답을 내주었다. “ 맥적은 아주 오래된 고기구이 방식이지만, 맥적이 한족의 문헌에 나타났을 때는 이미 예전의 불에 굽는 원시적인 방식이 아니었어요. 내가 연구한 바로는 이미 세밀한 가공이 이루어진 조리법이었죠. 고기구이 위에 뭔가 있었는데 그것은 농경민족이 발명한 조미료였습니다. 조미료, 다시 말해 장이 가미된 섬세한 형태의 고기구이가 바로 맥적입니다.” 정리해보면, 양념을 해서 구워낸 고기음식이 맥적이라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과연 이 맥적이라는 음식이 우리민족 최초의 고기구이였을까? 그리고 이천년 전 맥적에 사용됐던 양념은 또 무엇이었을까?
(p105)

평소에는 고기보다 채소를 즐기는 나지만, 고기음식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1년 동안 먹을 다양한 고기음식을 모두 맛본 것 같다. 얇게 저민 소고기에 찹쌀가루와 계란으로 옷을 입혀 부쳐내는 육전, 쫄깃한 식감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편육, 배 채와 육질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독특한 식감의 육회, 갖은 버섯과 채소를 넣고 함께 끓여낸 소고기 전골, 수원에서 맛본 엄청난 크기의 갈비구이. 다진 소고기를 석쇠에 올려 구워 먹는 언양식 불고기에서부터 국물에 밥을 비벼먹는 맛이 일품이 평양식 불고기까지 우리 민족의 고기음식은 그 어떤 민족의 음식보다 다양한 것 같다. 조리법은 어떠한가? 끓이고 삶고 찌고 볶고 지지고 말리고 삭히고 굽고... 무궁무진한 조리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국인의 고기음식이다.(p140)

만찬장에 도착한 첫 번째 손님은 첼리스트 정경화 선생님이다. 내일이면 해외 공연을 위해 출국을 하신다며 최종 리허설이 마치고 바로 이 곳 만찬장으로 달려왔다는 말에, 감사의 마음을 표했더니 되려 “너무 뜻 깊은 일이니까... 우리 음악으로도 한국을 알리지만 우리 음식을 통해 한국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당연히 와야죠.” 하시며 내 손을 꼬옥 잡아주신다. 디자이너 이상봉 선생님도, 사물놀이를 하시는 김덕수 선생님도, 그리고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김영세 선생님도 같은 마음으로 만찬장을 찾아주셨다. 터키대사관의 슉크루예 바야르 발시우스 부부는 한국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다면서 만찬에 참석한 이유를 밝혔고 일본, 스리랑카, 이란, 미얀마의 대사부부는 드라마 〈대장금〉을 기억한다며 우리 음식에 대한 호감을 표해왔다. 에이미 잭슨(주한 미국상공회의소 대표)은 가족을 위해 직접 김치찌개를 끓일 만큼 한국음식을 사랑한다고 전해왔고, 아시아재단의 피터백 대표는 유창한 한국말로 한국 음식의 이름을 줄줄 꿰서 스태프들을 놀라게 했다. 또한 시몽 뷔로(전 주한 캐나다 상공회의소 대표) 씨는 사찰음식에 대한 조예가 깊은, 진정한 한국음식 매니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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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과연 나는 어떤 사람들과 밥을 나누었는가?”
배우 이영애, 한식의 의미와 문화를
찾아 떠난 아름다운 음식 이야기

2014년 런던도서전 주빈국 한국 전시관, 『이영애의 만찬』 전시
SBS 〈이영애의 만찬〉 다큐에서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를 책으로 읽다!


왜 배우 이영애는 한식 문화를 소개하고자 했는가?

단아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이미지로 ‘산소 같은 여자’에서‘장금이’로, 다시 ‘금자씨’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온 배우 이영애. 최고의 배우이자 세간을 주목을 받는 셀러브리티 이영애가 결혼 후 가정과 출산, 육아에 전념하며 아들 승권과 딸 승빈의 쌍둥이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경기도 양평 문호리의 촌부로서 조용하고 소박한 삶을 꾸려오던 차, 이번에 한식 다큐멘터리를 계기로 그녀의 일상을 세간에 공개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 때문에 익숙한 서울 생활을 접고 경기도 양평 문호리로 이사를 했다. 새소리와 함께 눈을 뜨고 온갖 풀벌레들을 친구 삼아 뛰어놀고, 돌멩이를 접시 삼아 들꽃과 잡초로 밥을 짓는, 그런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고향을 쌍둥이에게 선물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 아이를 낳은 후 그 꿈을 실행에 옮겼고,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도록 나무 한 그루 없는 정원을 설계했다. 집안에도 넘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가구 대신 뽀로로 매트를 여섯 개나 깔아놓았다 한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차일피일 들어오는 작품을 고사하다 보니 어느새 9년이라는 공백이 생겼다. 요즘 개봉되는 한국영화를 볼 때마다, 그리고 그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들을 볼 때마다 마음 깊숙이 잠자고 있던 연기에 대한 욕망이 솟구치지만 연기를 하면서 두 아이의 엄마노릇을 할 자신이 없었기에 연기 욕심을 부리지 못하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다큐멘터리 제안을 받게 되었고, 〈대장금〉을 하면서 궁중음식도 접해봤고 비빔밥 홍보대사로 재능기부도 해왔지만‘정작 우리 음식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별로 없었구나’,‘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음식에 담긴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다 보니 아이들 먹는 것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이고, 한창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이 갈리기 시작하면서 음식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던 차였다. 두 달을 고심해 그녀는 다큐멘터리 출연 제...“과연 나는 어떤 사람들과 밥을 나누었는가?”
배우 이영애, 한식의 의미와 문화를
찾아 떠난 아름다운 음식 이야기

2014년 런던도서전 주빈국 한국 전시관, 『이영애의 만찬』 전시
SBS 〈이영애의 만찬〉 다큐에서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를 책으로 읽다!


왜 배우 이영애는 한식 문화를 소개하고자 했는가?

단아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이미지로 ‘산소 같은 여자’에서‘장금이’로, 다시 ‘금자씨’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온 배우 이영애. 최고의 배우이자 세간을 주목을 받는 셀러브리티 이영애가 결혼 후 가정과 출산, 육아에 전념하며 아들 승권과 딸 승빈의 쌍둥이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경기도 양평 문호리의 촌부로서 조용하고 소박한 삶을 꾸려오던 차, 이번에 한식 다큐멘터리를 계기로 그녀의 일상을 세간에 공개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 때문에 익숙한 서울 생활을 접고 경기도 양평 문호리로 이사를 했다. 새소리와 함께 눈을 뜨고 온갖 풀벌레들을 친구 삼아 뛰어놀고, 돌멩이를 접시 삼아 들꽃과 잡초로 밥을 짓는, 그런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고향을 쌍둥이에게 선물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 아이를 낳은 후 그 꿈을 실행에 옮겼고,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도록 나무 한 그루 없는 정원을 설계했다. 집안에도 넘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가구 대신 뽀로로 매트를 여섯 개나 깔아놓았다 한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차일피일 들어오는 작품을 고사하다 보니 어느새 9년이라는 공백이 생겼다. 요즘 개봉되는 한국영화를 볼 때마다, 그리고 그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들을 볼 때마다 마음 깊숙이 잠자고 있던 연기에 대한 욕망이 솟구치지만 연기를 하면서 두 아이의 엄마노릇을 할 자신이 없었기에 연기 욕심을 부리지 못하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다큐멘터리 제안을 받게 되었고, 〈대장금〉을 하면서 궁중음식도 접해봤고 비빔밥 홍보대사로 재능기부도 해왔지만‘정작 우리 음식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별로 없었구나’,‘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음식에 담긴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다 보니 아이들 먹는 것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이고, 한창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이 갈리기 시작하면서 음식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던 차였다. 두 달을 고심해 그녀는 다큐멘터리 출연 제안을 받아들였다.
순전히 엄마로서의 욕심 때문에 시작된 다큐였다. 아이들이 좀 더 자랐을 때 함께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한국음식에 관한 기록’이 하나 정도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이 또한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영애의 만찬』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6개월간 촬영된 다큐는 2부작으로 방영되었다. 2부작으로는 6개월간의 이야기를 모두 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에 방송에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와 배우 이영애의 소회를 책으로 담아 출간하였다. 마침 또 2014년 런던도서전에 주빈국으로 한국이 선정되면서 세계인들에게 한식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책으로 한국관에 전시되어 한식을 더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화려한 조선시대의 식문화를 찾아 떠나다

『이영애의 만찬』에는 역사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년을 기념하기 위해 궁궐을 떠나 화성에서 보낸 8일간의 일과와 축제의 모든 과정을 무려 8권의 책에 걸쳐 소상히 기록하도록 명했는데 그것이 바로 〈원행을묘정리의궤〉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따르면 정조임금이 받은 수라상에 오른 찬품(반찬)의 수는 모두 일곱 그릇(7기)의 음식이 올랐다 한다. 8일 동안 단 하루도 일곱 그릇을 넘긴 적이 없다. 반면 혜경궁 홍씨가 받은 수라상에는 모두 열세 그릇(13기)에서 열다섯 그릇(15기)에 달하는 음식이 올랐다.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연구해온 역사학자들은 효심이 깊은 정조가 회갑을 맞은 혜경궁 홍씨에게는 특별히 열다섯 그릇의 찬을 올린 것이며 본인은 평상시대로 일곱 그릇의 찬이 올라간 수라상을 받았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조선은 충효의 나라이기에 자식인 본인보다 어머니께 더 나은 밥상을 올린 것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다.
이영애는 궁금했다. 지금도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혹은 생일이나 혼례 같은 잔치가 있는 날이면, 수일간은 밥상위에 오르는 반찬의 가짓수부터 달라진다. 몇 날 며칠을 두고두고 먹을 만큼 넉넉해지는 것이 한국인의 잔치 인심 아니던가? 하물며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은 조선후기에서 전례 없이 성대했던 잔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조의 밥상이 12기가 아닌 7기라 하니, 고등학교 가사 교과서에서 본 12첩 수라상은 대체 무엇인가 싶다.
『이영애의 만찬』에서는 여러 역사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도움을 구했다. 역사학자에 따르면, 첩이란 반찬의 가지 수에 따라 정해지는데 모든 반찬이 첩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밥, 국, 찌개, 전골, 찜을 제외한 반찬을 첩으로 세는데, 그에 따르면 정조는 3첩이나 4첩에 불과했고 혜경궁 홍씨가 받은 수라상도 첩으로 계산하면 7첩이나 9첩에 해당되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12첩 상차림에는 얼마나 많은 음식이 오르는 것일까? 12첩을 차리기 위해서는 최소 스물한 그릇의 음식이 상에 오른다고 한다. 상다리가 휘청거릴 만큼 많은 양의 음식이다.
『이영애의 만찬』은 궁중음식의 소박한 수라상을 들여다본다. 또 잔칫날 마련되는 궁중음식들은 구중궁궐 안에서만 먹는 음식이 아니라 궁궐 밖으로 나가 양반가와 서민들도 맛을 볼 수 있도록 골고루 나눠먹었다. 계급을 초월한 한국의 소통과 화합의 문화를 엿볼 수가 있다.
배우 이영애는 실제 정조의 밥상을 차리는 데 도전해봤다. 정조임금의 수라상에 올랐던 음식 중 여섯 가지 요리인 홍반, 도라지나물, 오이나물, 미나리나물, 저갈비, 골탕을 직접 조리해보기도 했다.

360년, 반가의 밥상을 찾아 떠난 여행

이영애는 조선시대의 밥상을 찾아 경상북도 영양으로 떠났다. 재령 이씨 집안의 13대 종부인 조귀분 여사의 안내를 받아 330년 전 조선시대의 요리비법이 담긴 서책 〈음식디미방〉과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은 330여 년 전 석계 이시명 선생의 부인이었던 안동 장씨 부인이 저술한 음식 조리서로 동아시아 최초의 여성 조리서이다. 이 책에는 국수, 만두, 떡 같은 면병류에서부터 어육류, 채소류는 물론 술 담그는 법과 장 담그는 법까지 무려 146가지의 음식 조리법이 담겨 있다. 책의 말미에는 “이 책이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은 각각 베껴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마음도 먹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쉽게 떨어지게 하지 말라”라는 신신당부의 말을 적어 둔 것을 보고 이영애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했던 할머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안동 장씨 할머니의 노고 덕분에 300년 전의 음식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고 이영애는 생각했다.
이영애는 이곳에서 빈자법, 잡채, 동아 누르미, 어만두, 연계찜 등을 배우며 양반가의 음식을 몸소 체험하였다. 특히 빈자법은 오늘날 빈대떡으로 변화한 것으로, 오늘날 서민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은 빈대떡이 조선시대에는 양반가나 궁중에서 손님상에나 오르던 귀한 음식이었다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한식은 나눔과 소통의 만찬이다

이욍에도 『이영애의 만찬』은 가장 오래된 조리법인 고기구이를 찾아 중국, 몽골, 일본 등을 찾아다니며 우리나라 불고기 양념의 기원을 따라가 보기도 한다.
이러한 한식 문화를 함께하며 이영애는 한식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들과 밥을 나누었는가?” 이를 계기로 그는 다문화 가정의 엄마들과 모여 음식을 나누기도 하고, 문호리의 이웃사촌들을 초청해 잡채와 불고기 요리를 대접하기도 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구찌 CEO를 비롯한 해외 인사들을 초청해 우리 음식을 선보였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삼청각에서 여러 인사들을 모시고 만찬을 연 것이다. 한국의 미와 아름다움을 선보이기 위해 한복디자이너 한은희 선생, 도예가 이능호 작가, 요리명장 이병우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한 달 넘게 도움을 받아 준비한 이영애의 만찬은 성대하게 열렸으며, 8코스로 마련된 음식 중 비빕밥은 테이블에 모인 4명의 사람들이 함께 비벼 나눠먹을 수 있도록 퍼포먼스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 음식은 나눠먹으면서 소통하는 화합의 만찬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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