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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기사] BL 드라마 속 세계는 ‘사회적 갈등 없는 동성애’로 채워진다.

kcyland 2022.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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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의 사랑 실은 ‘전통 로맨스’였네
입력2022.05.19. 오전 5:25  수정2022.05.19. 오전 5:26

이상원 기자
  
왓챠 등 OTT 플랫폼을 타고 물밑에 머물던 BL 장르물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파격이 늘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BL 드라마 속 세계는 ‘사회적 갈등 없는 동성애’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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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 드라마 <시맨틱 에러>의 한 장면. ©왓챠 제공


〈시맨틱 에러〉의 성공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 드라마는 남성 동성애자들의 연애를 그린 작품이다. 3월16일 종영 이후에도 OTT 플랫폼 왓챠 톱10에 7주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4월 5주째에는 드라마 대본집이 인터넷 서점 예스24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그간 한국 문화계에서 비주류로 여기던 장르가 일약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시맨틱 에러〉가 성공하자 BL(Boy’s Love)이라는 이름으로 물밑에만 머물던 다른 이야기들도 영상화 소재로 각광받는다. 그런데 파격이 늘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BL의 부상이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까지 이끌어낼지는 미지수다.

한국 사회에 낯선 동성애 서사가 인기를 끌게 된 계기는 OTT다. 지상파와 달리 OTT 작품은 심의 규제나 사회적 논란에서도 자유롭다. 사실 〈시맨틱 에러〉뿐만 아니라 넷플릭스를 필두로 한 OTT에서 히트한 작품 대부분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적당히 ‘용인’하는 작품과 거리가 멀다. 특정 취향을 가진 강력한 팬층이 개인용 시청 기기를 이용해 시청한다는 걸 전제하고 만든다. 〈시맨틱 에러〉를 비롯한 BL 드라마가 쏟아져 나온 것은 OTT 플랫폼이 전성기를 맞은 최근의 일이다. 지난해 6월 나온 〈세빛남고 학생회〉(왓챠)는 남고생들의 연애를 다뤘다. 지난 2월에는 BL과 판타지를 결합한 〈첫사랑만 세 번째〉(시리즈온·티빙 등), 3월에는 남자 대학생들이 주인공인 〈블루밍〉(시리즈온)이 나왔다.

BL이라는 장르에 배경지식이 없는 시청자가 〈시맨틱 에러〉를 보면 두 번 놀란다. 첫째, 이 드라마 내에는 ‘동성애 혐오’가 없다. 그간 대중매체에서 터부시되어온 동성 간 연애와 애정 표현을 이 드라마는 거리낌 없이 그린다. 이 세계관에서 동성애 자체는 갈등 요인이 아니다. 연애 당사자도 상대가 동성이라는 사실을 두고 갈등하지 않고, 주변 인물들이 동요하는 모습도 없다. 둘째, 뜻밖에도 급진적 소재를 다룬 〈시맨틱 에러〉는 몹시 ‘전통적’인 한국 로맨스 드라마의 공식을 따른다. 주인공 한 사람을 여성으로 바꾼다면 ‘진부하다’고 비판받을 소지도 있다.

대사와 전개로 계보를 따진다면 〈시맨틱 에러〉는 하이틴 로맨스물의 적자에 가깝다. 드라마는 앙숙이었던 대학생 두 사람이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그린다. 적극적이고 유능한 A가 소극적이고 냉정한 B에게 구애한다. 처음에는 A를 거부하던 B가 차츰 마음을 열고, 끝내 사랑에 빠진다. 팬들은 이 과정에서 양자가 주고받는, “1분 뒤 키스할 거야. 도망갈 거면 지금 도망가” “전화 끊어요. 지금부터 중요한 얘기 할 거니까” 등을 명대사로 꼽는다. 이들의 연애를 방해하는 사건들은 현실적이지만, 특정 연령층의 공감에 호소하는 요소가 많다. 수업 조모임에서 만나 서로 첫인상이 좋지 않았고, 관계에 끼어드는 여성이 있었으며, 한 사람이 취업을 하게 되어 멀어질 뻔했다. 갈등은 모두 여타 로맨스 드라마와 비슷한 방식으로 해결된다. 시청자들이 가장 만만찮은 갈등이라고 여길 만한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애초 드라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중 안전장치 갖춘 포르노그래피”


‘사회적 갈등 없는 동성애’는 〈시맨틱 에러〉만의 변주가 아니다. 이 드라마 원작소설은 ‘BL 장르의 입문작’이라고 불린다. 일상적이고 가벼운 소재를 써 대중성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이 장르 전반이 공유하는 최소한의 체계에 충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BL은 ‘퀴어물’과는 다르다. 동성애를 다루되, 그로 인한 마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BL 속 인물들은 동성애자 정체성이 없다. 그래서 BL은 ‘일상물’도 판타지이다. 이 장르의 인기를 어떻게 봐야 할까.

BL 연구는 일본에 많다. 현대적 의미의 BL이 일본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일본 BL 만화가 PC통신을 통해 수용돼 발전한 게 한국 BL 문화이다. 여성 BL 팬을 속칭 ‘부녀자’라고 하는데, 일본어 ‘후죠시(腐女子)’에서 왔다. 이성애자 여성임에도 남성 동성애 문학에 열광하는 이들이다. 세이토쿠 대학의 야마오카 시게유키 교수는 1912명을 설문조사해 2016년 책 〈후죠시의 심리학〉을 냈다. 그중 후죠시에 속하는 이들은 318명이었다. 책에서 야마오카 교수는 BL을 “여성들에게 있어 ‘실행 불가능성’과 ‘사랑의 귀결로서의 성애’라는 이중 안전장치가 마련된 포르노그래피”라고 정의한다.

야마오카 교수가 BL의 본질이 포르노그래피라고 본 이유는 이렇다. 후죠시가 ‘남성 동성애’ 자체에 흥미가 있다면, 실제 게이 남성을 겨냥한 작품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이들은 BL 속 캐릭터의 사랑만 즐길 뿐, 실제 동성애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여기에 더해, ‘실제 게이’ 다수는 BL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BL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전 일본에서 이 장르가 ‘탐미(耽美)’라고 불렸던 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BL은 멋진 등장인물의 아름다움을 탐할 뿐 그들이 처한 사회적 맥락은 후순위로 미루거나 제거한다.

‘이중 안전장치’라는 표현은 ‘왜 BL이란 판타지가 발명됐나’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대부분의 BL은 남성의 연애만 다루고, 두 사람의 성애에 반드시 사랑이 필요하다는 ‘제약’이 들어간다. 이것은 여성 독자(시청자)가 가부장제하에서 욕구를 분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채운 족쇄다. 김소원 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강사에 따르면 BL의 인기는 “성에 대한 억압, 그리고 보수적이며 남성 중심적 사회에 대한 반동”이다. 그는 ‘그녀들은 왜 소년들의 사랑에 열광하는가(2018)’ 논문에서 “남성용 성인 만화의 경우 철저하게 남성 행위자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반면 (…) BL의 경우 두 주인공 모두에게 균등하게 시선이 배분되지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묘사된다”라고 적었다.

BL 팬의 ‘관찰자’ 지위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적 주체가 되지 않겠다는 알리바이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폭력성 표출로 이어지는 때도 있다. 이성애 로맨스에서는 여성혐오로 비판받는 데이트폭력, 일방적 괴롭힘, 강간 장면이 BL 작품에는 자주 보인다. 드라마화 예정인 BL 만화 〈킬링 스토킹〉 역시 폭력성으로 논란을 샀다.

〈시맨틱 에러〉가 불러온 BL의 인기가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리라고 전망하기가 쉽지 않다. ‘신데렐라 스토리’ 속 전통적 성역할에 불만족하는 시청자가 많다는 의미는 된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줄지는 미지수다. 몇몇 연구자들은 전형적 BL은 오히려 성소수자는 물론 여성혐오적 현실도 배제한다고 말한다. 일본 문학 연구자인 키스 빈센트 보스턴 대학 교수는 2007년 저서에 “(BL 등장인물은) 특권과 놀이로 가득한 우주에서 사치를 누릴 뿐이다. (여성 독자가 여기에) 자기 동일화한다고 해도, 그것은 여성혐오와 동성애혐오적 억압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지워낼 것을 대가로 삼는다”라고 적었다. 책 〈BL 진화론:보이즈 러브가 사회를 움직인다〉에 이 말을 인용한 미조구치 아키코도 여기에 동의한다. 그는 정형화된 BL이 아니라 ‘진화한 BL’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미소지니(여성혐오)와 호모포비아, 이성애 규범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는 남성 동성애자 캐릭터와 주변 모습이 현실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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