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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안쓰러워하던 30대 영끌이의 첫 내 집 구입기 - 받은글

kcyland 2020.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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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안쓰러워하던 30대 영끌이의 첫 내 집 구입기


뜬금없이 국토부 장관이 나를 안쓰러워했다

저는 김현미 장관님이 안쓰럽다고 말씀하신, 그러니까 그 문제의 패닉 바잉을 한 영끌 30대입니다.
오늘은 제가 첫 내 집을 구매하면서 느낀 감정과 깨달은 것들에 대해 몇 자 적어볼까 해요.

사실 김현미 장관님은 저희 엄마 외에 처음으로 저를 안쓰러워해 준 사람입니다.
7월 불장 한가운데에 생애 첫 주택매매 계약서에 벌벌 떨며 사인을 하고 온 제게
"다주택자 매물을 받아 산 30대 안쓰럽다"라고 하셨죠.

제가 국토부 장관님에게 동정을 받다니.
30여년 정도밖에 못살았는데, 별 일이 다 생기네요.

직장 생활 10년에 가진 돈 박박 긁고 주담대에 주식 다 팔아서 후진 동네에 소형 구축 아파트 한 채 마련하면서 장관에게 불쌍하다는 소리를 듣다니...
얼떨떨합니다.


대기업 다니는 소박한 개룡이들

제 소개를 잠깐 하자면 저는 부끄럽지만 저희 친지 사이에서는 나름 개룡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곳은 개천이 아니라 진창이었어요.
가개붕의 따뜻한 개천은커녕 냄새나는 진흙탕 속에서 그러려니 살며 초중고 공교육만 받고 졸업하고, 어찌어찌 시험 머리가 좋아서 명문대에 입학합니다.
대학교 , 대학원 동안 수십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어서 간신히 학교를 졸업하고 학위를 따서 대기업에 취직했고, 연봉의 70%를 저축하며 종잣돈을 모았습니다.
매달 드리는 부모님 생활비와 제 생활비 약간을 뺀 나머지를 모두 저축하며 그저 돈만, 돈만 모았어요.

한국에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가서도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은... 역시 비슷한 개룡이들, 그저 어려운 형편에도 제 힘으로 발딱발딱 잘 일어나, 일 열심히하고 돈 열심히 모으는 착실하고 소박한 이들이었습니다.
중산층의 자녀, 금수저들도 회사에 많겠지만 회사를 오래 다니다 보니 아끼고 아껴서 가족들을 챙기고 미래를 꿈꾸는 개룡이들이 세상에 이렇게 많구나 싶을 정도로 이런 대기업 흙수저들이 주변에 많았습니다.
'야, 대기업 다니는 게 무슨 개룡이냐. 판검사나 되어야 개룡이지'라고 하실 분들이 있겠습니다만,
우리들 집, 우리들의 친척들 세계에선 저희가 개룡이입니다.
스카이 나온 개룡이들 중에 판검사 고시 공부할 돈이 없어서 바로 취직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단지 '중산층이 되고 싶다, 내 가족은 진창에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이 머리 좋은 30대들은 오늘도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주말에 특근을 해가면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고 있는 것이죠.

저는 그런 친구들을 만나면 기뻤습니다.
애초에 금수저, 은수저에 대한 질투 따윈 없습니다.(그들이 저희들과 어울려주지도 않고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거고 그저 남의 도움 없이 여기까지 온 자신이 기특하고 대견하고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꿈을 꾸고 희망을 다지는 게 좋았습니다.


집을 사기로 결심하고 나서 3달 동안 내가 느낀 것

부동산이나 내 집 마련에 별 관심 없던 제가 집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올 상반기였습니다.
매일 낡은 다가구 꼭대기 층 전셋집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락 거리는 부모를 더 이상 못 보겠어서, 제가 모은 돈 전부와 주담대, 부모의 전세금 일부를 합해서 부모님이 집을 날린 지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부모와 함께 살 '자가'라는 것을 구입해보기로 합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아파트라는 것이 이렇게 가격이 오른 줄 몰랐습니다.
회사 옆 자취방을 오가며 야근만 하다가 요 몇 년 집이 이렇게 비싸졌는지는 정말 몰랐어요.
그렇지만 집값이 올라버렸는데 이제 어쩌겠습니까. 이 사회의 누군가는 돈을 벌었겠죠.. 허허.
저는 그냥 제 분수에 맞는 집을 찾기로 합니다. 분노할 에너지도 제게는 아깝습니다.
청약이요? 허허.
청약 가점이라는 계산 해보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치 허공에 새총을 날리듯 서초구 소형 평수에 한 번 넣어보고 그만두었습니다. 친구들이 미쳤냐고 비웃었지만 그냥 한 번 흐르는 거대한 강물에 돌 던지듯 넣어보고 싶었어요.
자취하는 30대 미혼 여성에게 청약이라니요. 그런 말씀 마셔요. 미혼모가 되지 않는 이상 가당찮은 꿈입니다.

일단 변두리에서 살만한 아파트를 골라봅니다.
부동산을 사본 적이 없으니 뭐가 좋은 집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주담대도 알아봅니다. 투과 지구 40%라. 옛날엔 70% 정도 아니었나... 그게 언제 적 이야기냐. 마음 접자.
그렇지만 40%.... 40%... 모기지라는 것이 이렇게 적은 것이 일반적인 것인가?
내 집 마련하는데 나라가 원래 이렇게 박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게 정말 맞는 건가 싶습니다.

아무튼 근처에서 집을 계속 알아봅니다.
6,7월 지옥같이 뜨거웠던 장에서 6억짜리 구축 아파트가 자고 일어나면 몇 천씩 올라갑니다. 따릉이를 빌려 타고 낯선 동네를 돌며 집을 알아봐도 모든 곳이 마찬가지입니다.
아아... 그냥 빨리 사야겠습니다.
패닉이고 나발이고 떠나는 기차에 매달리는 인도 빈민처럼 저는 그렇게 구축 아파트 한 채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 몇 달 사이에 정부에서는 전에 본 적 없는 스피드로 임대차 법을 통과시켰고, 각종 부동산 정책과 공급책, 3기 신도시 방안을 토해내듯 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집주인과 세입자는 싸우기 시작했고, 다주택자는 팔고 싶어도 못 판다며 울부짖었고, 우리 엄마가 사시는 다가구 전세는 코로나로 집 보러 오는 사람도 없고, 장관님은 감정원 시세를 중심으로 재정리하겠다는 아무 말 대잔치를 해서 갑자기 촘촘하게 짜 놓은 제 자금 조달 계획을 흔듭니다.

갑자기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복잡하고 화나는 세상에 끌려 들여온 기분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어른이고 가족을 재울 집을 찾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요.
진창 개울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배운 것도 없고 부모로부터 받을 도움도 없기 때문에
개룡이들은 알아서 가족을 챙기고 지켜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알아서 공부하고, 귀동냥하며 차근차근 내 집을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개룡이의 분노, 30대가 등을 돌린다.

요 몇 달 주변에 집을 사려는 30대들은 모두 아우성이었습니다.
범죄자가 된 것처럼 숨어서 신용대출을 받고, 혹시 신용 대출을 집살 때 쓴 것이 들켜 혹시라도 주담대 회수당할까 봐 쉬쉬하면서 서로 정보를 공유합니다. 자금 조달 계획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절박하게 서로에게 묻고, 불법적인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구청이나 세무서에서 괜히 트집 잡으며 이것저것 소명하라고 하면서 힘들게 할까 봐 무서워합니다.

첫 집을 사는 30대들은 밤새 부동산 카페에, 블라인드(직장인 앱)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찾습니다.
모두들 분노와 불안, 걱정과 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시기에 집을 사도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매일매일 정부가 생각 없이 정책으로 흔들어대고, 그 흔들림에 소중한 자금 계획, 내 집 입주 계획이 미친 듯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김현미 장관이 KB 시세 안 쓰고 감정원 시세를 쓰겠다고 했던 날에는 분노로 직장인 커뮤니티가 들끓었습니다.
장관이 생각 안 하고 막 뱉은 그 한마디에 돈을 긁어 모아 내 집 마련을 준비하던 가재, 붕어, 개구리, 도룡이, 개룡이들의 생활과 미래가 덜컹덜컹 흔들린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나 봅니다.
노모와 둘이 살려고 계약한 첫 집에 세입자가 계약갱신청구권을 쓰겠다고 말을 바꾸는 바람에 거리에 내앉게 되었다는 대기업 개룡이 사연을 보고 다 같이 분노하고 걱정하고, 방법을 찾아봐주는 30대들의 마음이 어떨지 그들은 모르겠죠.

집을 살 준비를 하면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평평하고 작은 개울 돌을 하나 집어서 그 옆에 살겠다는데 제 손을 찰싹하고 쳐내는 것이 현재 정부라는 것을요.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고,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노동 소득으로 기틀을 마련해 첫 집을 사려는 저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집값을 올리는 투기 세력, 정책 효과를 반감하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요.

그들은 임대 주택에 살만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만 보겠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의 자식이자 가족일 수도 있는 도룡이, 개룡이, 그러니까 어떻게든 자립해서 중산층이 되어보려고 죽도록 노력한 대기업 흙수저들의 내 집 마련에 대해서는 짜증만 내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정책 내놓아서 효과 나타나는 거 대통령에게 칭찬받아야 하는데
너네가 왜 집을 사 재껴가지고 정책발이 안 받잖아! 너네 뭐야 짜증 나!

김현미 장관의 "다주택자 매물을 받아 산 30대 안쓰럽다"라는 발언은 자기가 계획한 일이 어그러지게 만든 30대들에 대한 짜증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실수요자 장이라고 부르는 이번 여름 장의 주인공은 대기업에 다니는 흙수저 개룡이들,
고생해서 돈을 모은 베이비 부머 부모가 조금 빌려줄 수 있지만 대부분 자기 노동 소득으로 돈을 모아 집을 사려는 나무 수저들입니다.
노도강 금관구를 훑은 손은 노동으로 굳어진 단단한 청장년의 덜덜 떨리는 손이고,
네이버 부동산 매물을 미친 듯이 검색하는 눈은 매일 야근으로 충혈된 직장인 30대의 눈입니다.

생각 없는 대책으로 시장을 교란하고 감당 가능한 대출까지 꽁꽁 막고, 투기네 어쩌네, 안쓰럽네 어쩌네 하면서 비난하는 정부에게 이 30대들은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어제는 고 신용자의 신용대출을 틀어막겠다고 했다지요.

직장인에게 신용 대출이 어떤 의미인지 정부는 알까요?
대기업 흙수저들은 부모에게 물려받거나 차용할 수 있는 자본이 없기 때문에 대신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으로 신용을 창출해서 자본을 끌어왔습니다. 그야말로 본인의 노력으로 얻은 신용이요 자본의 기틀입니다.
그걸 지금 정부가 막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직장인들은 더 크게 분노합니다.

정부가 이거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 개룡이들은 상당히 똑똑합니다.
우리를 다시 개울로, 진창으로 돌려보내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고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자신들의 힘으로 이겨낼 사람들이죠.
자신들이 지지해서 밀어 올린 정부지만, 제대로 못한다면,
자신들의 삶의 근간을 뒤흔든다면 냉정하게 돌아서는 것이 지금의 30대들입니다.

가재, 붕어, 개구리로 살기 싫다고.
나는 정말 그렇게 살기 싫다고. 벗어나고 싶다고.

그렇게 안 살기 위해서 노동하고 자본을 쌓고 또 언젠가는 그 자본으로 자본 소득을 얻을 거라고.
투자인지 투기인지는 꼰대들의 눈깔에 따라 판단하시라고.
꼰대의 정의로 무엇을 어떻게 판단하든 관심 없다고.
우리는 우리의 공정 기준과 윤리에 따라 자본주의의 원칙에 충실하게 성장할 거라고.

30대 대기업 흙수저, 개룡이들은 지금까지 살아 온 것처럼 이를 악물고 있습니다.
30대의 마음이 돌아서면 앞으로 꽤 오랜 시간 어려움을 겪게 될 거라는 것을 정치가들이, 정부가 알고 있길 바랍니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가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꾸려 갈 것이다.

이 집의 구매는 세상의 입장에선 사실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아무도 관심 없어 하는 그런 작은 점과 같은 이벤트이지만
제게는 모아온 전 재산을 쏟는 일생 일대의 큰 일이었습니다.

앞으로 정부가 어떻게 하든, 정책이 어떻게 나오든, 그 무엇 때문에 집값이 떨어지든 어쨌든 괜찮습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의 삶을 꾸려갈 것입니다.

집을 마련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경험하게 되어서, 이에 몇 자 적어 보았습니다.

등기증을 받는 날의 마음은 어떨까요.
20년 동안 집 없이 전전하던 부모님을 내 집에서 주무시게 하는 그날은 어떤 기분일까요.

제가 집을 계약했다고 하자 친한 동생이 축하해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니, 진짜 딸이 해냈다. 진짜...딸이 해냈어.

그 말을 듣고 마음을 채우고 있던 불안과 걱정이 조용히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 집이라는 것이 이런 의미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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